서른이 되던 날 밤, 북경에서

마스크를 씌워주던 네가 있어 외롭지 않았어

by 김현승

외출 준비를 하면서 ‘헤이, 카카오’를 외쳐 오늘 날씨를 물었다. 잠시 후 매우 인공적으로 상냥한 목소리가 핵심 기상 정보만 쏙쏙 뽑아 알려줬다.

“현재 ○○동은 흐려요. 이후에는 비가 오겠어요. 기온은 19도에서 21도에요. 미세먼지 농도는 좋음이에요. 우산 챙기는 거 잊지 마세요.”

현관 신발장에서 우산을 꺼내고 무심코 문을 열다가 멈칫, 다시 들어왔다. 신발을 또 벗었다가 신는 그 작은 행동도 급할 때는 엄청난 체력 낭비를 한 것마냥 잔뜩 찡그리게 된다. 신발을 찡그린 얼굴처럼 구겨 신는 동시에 손으로는 마스크를 꺼내 쓰면서, 일 년이 넘었는데도 외출 필수품 하나가 더 늘어난 걸 매번 깜빡하는 게 스스로 한심했다. 한숨을 폭 쉬었더니 마스크에 갇힌 한숨 때문에 입가에 습기가 찼다. 나는 원래 영하 10도의 겨울 날씨에도 답답해서 장갑조차 끼지 못했고, 휴대폰 어플에 미세먼지 경고등이 아무리 시뻘겋게 ‘위험’ 경고를 해도 숨을 참고 말지 마스크는 못끼겠다는 고집쟁이였다. 한겨울에 치마 입겠다고 다리 꽉 끼는 스타킹을 신는 것도, 배부르게 밥 먹으면 풀어야 하는 벨트를 차는 것도 다 귀찮아하는 신체 자유주의자에게 매일 마스크를 써야하는 현실은 가혹하다. 심지어 미세먼지가 좋음인 날도 마스크를 안 챙겨서 집에 다시 들어가야하는 현실이라니. 버스 창가에 기대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몇 년 전 북경에 사는 친구 S를 만나러 갔다가 매일 마스크를 쓰고 출근하는 S를 안쓰럽게 여기며 귀국했던 일이 생각났다.



S는 대학 입시만을 목표로 숨을 쉬어야 하던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에서 만나 가쁜 숨을 함께 몰아쉬며 10대를 탈출한 동지였다. 거기다 10년 가까이 길 하나 건너 살았던 동네친구이기도 했고, 같은 대학에 입학해 같은 캠퍼스에서 20대를 보냈다. 집 근처에 사는 같은 학생을 연이어 과외 지도하며 용돈을 벌기도 했다. 그런 특별한 인연 덕분에 우리는 서로의 시시콜콜한 연애사를 포함하여 가족 구성원의 건강 상태며 사소한 습관까지 기꺼이 TMI를 공유한 사이다. 생일이 빨라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일 년을 더 기다려야 스무 살이 된다는 것마저 똑같았다. 그렇게 열아홉 살을 한 달 앞둔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수능 끝나고 얼마 안 된 때라 학교에서 대충 시간만 때우고 터덜터덜 집으로 같이 걸어가면서 내가 말했었다.

“야, 지금부터 딱 11년 뒤에는 스물아홉 살이겠네. 지금은 스무 살이 빨리 되고 싶은데 그땐 서른 살 되기 진짜 싫겠다. 우리 스물아홉에서 서른 살로 넘어가는 12월 31일에는 어디여도 괜찮으니까 우리나라 아닌 곳에서 같이 카운트다운하면서 위로해주자.” 그랬더니 내 친구가 무심한 표정으로, “나 결혼할 건데?” 이러길래 고백했다가 차인 것처럼 새침하게 입술을 쭉 내밀고는 그 말을 잊어버린 채 살았다. “잠깐 나와 봐” 한 마디면 만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 울고, 웃고 하는 동안 우리는 먹고 살만한 월급을 주는 직장이 생겼고, 몇 번의 연애를 실패하면서도 한 며칠 서로를 위로하다보면 이별 따위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스물아홉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S는 맥주잔을 테이블에 쾅 내려놓은 후 ‘나 회사 그만둘 거야, 미래가 안 보여.’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스무 번도 더 들었던 문장이고, 회사 다니는 친구들이 술마시면서 으레 하는 말이라 생각했으니 나는 그저 덤덤하게 “응, 그만 둬.” 했었다. 그런데 몇 주 지나고 S는 정말 자유인이 되어 한 1년 중국어 배우면서 바람 좀 쐬겠다고 바람처럼 떠났다. 10년 넘게 영어를 공부했어도 영어권 국가에서 혼자 살아보겠다고 떠나는 일이 아예 다른 세계 일처럼 느껴지던 어린 나에게 S가 갑자기 혼자서만 훌쩍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입사한 첫 직장을 과감히 버린 것도 대단했지만, 처음 배우는 언어를 외국에서, 그것도 황사와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 배우겠다는 결심을 하다니……. 10년을 알고 지낸 친구가 그런 실천력을 가진 인간이었다니, 예측 가능한 범위의 안전한 계획과 안정적인 수입과 안심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시간에만 길들어 있던 나는 함께 걷던 친구로부터 한 500년쯤 뒤처져 덩그러니 혼자 서 있었다. 충격과 배신감 비슷한 감정에 한참을 멍 때리며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했지만, 그동안 우리가 나눈 이야기 속에서 천천히 답을 찾았다. SNS로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떠나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만큼 절박해서 떠난 거라는 S의 말이 무슨 말인지 조금은 이해하게 됐지만, 그래도 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거듭 상기시켜주며 S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며 한편으로 동경했다. 긴 시간 동안 함께했으면서도 벗어나지 않고는 못 배길 너의 사연을 나는 너무 가볍게 보았던 것 같다고 미안한 마음을 애써 숨기면서. 그렇게 안부를 주고 받으며 시간이 흘렀지만 S는 돌아오지 않았다. 계획한 1년을 몇 개월 앞두고 S는 우연히 북경 취업박람회에 참석했던 것을 계기로 한국 모 기업의 북경 지사에 덜컥 합격하고 말았다.


그 해 12월, 인생, 한 치 앞도 모른다더니 나 역시 4년 동안 매일같이 눈물 흘리며 버티고 버티던 첫 직장에 이별을 고하고 S를 만나러 북경으로 날아갔다. 그야말로 애증의 장소였던 첫 직장과의 이별로 마음이 물먹은 솜처럼 축축해진 나는, S와 함께 며칠 보내고 나면 악몽같던 4년의 기억을 훌훌 털고 나도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첫 직장에서 무사히 탈출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것에 괜히 우쭐해서 미드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마냥 들떴다. 그런데 자아도취의 허세 감성으로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나를 보자마자 S는 거의 방독면에 가까운 어마무시한 마스크를 나에게 척 씌워줬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도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가 팔리고는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주 심한 황사 때가 아니면 마스크를 흔히 볼 수는 없던 때였다. 게다가 3M이 고딕체로 크게 쓰인 플라스틱 필터까지 붙어 있는 마스크는 처음이어서 나는 모양 빠지게 이게 뭐냐고 받자마자 빼버렸다. 그런데 북경 시내에 들어가니, 마치 마스크 패션쇼를 하는 듯 다양한 재질의 마스크와 심지어 커플 아이템으로 요란하게 디자인된 컬러풀한 마스크를 나란히 끼고 걸어다니는 북경의 사람들을 보고는 빼버렸던 마스크를 다시 조용히 집어들었다. 마스크없이 맨 얼굴로 걸어다니는 건 강철 폐가 아니고는 불가능해 보이는, 두 걸음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사상 최악의 미세먼지 시즌이었다.


마스크를 거의 벗지 않는 S와 달리 나는 계속 썼다 벗었다를 반복하면서 뿌연 먼지 속에서도 기어코 사진을 찍어가며 여행을 즐겼다. 새우완자가 꽉찬 조개모양 딤섬과 에그카스타드가 흘러내리는 딤섬을 양 손에 들고 호들갑 떠는 나를 보고 S도 신이 났는지 그 뒤로 줄줄이 북경 먹방 여행을 가이드했다. 훈남 요리사가 밀가루 면발로 국수 쇼를 보여주는 하이디라오 훠궈에, 이것이 대륙의 클래스인가 싶게 커다란 물고기를 통째로 쪄 주는 카오위 맛집까지 정복하고 한국에서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마라탕까지 경험했다. 그러고나니 첫 직장에서 고단했던 시간들이 이미 10년은 된 옛날 얘기처럼 느껴졌고, 마스크 따위 쓰지 않아도 앞으로 가슴이 답답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천안문과 자금성, 천단공원, 천문대가까지 북경 하면 떠오를 곳들을 둘러보는 내내 S는 마스크를 자꾸 가방에 넣어버리는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3박 4일 간 마스크 안 쓴다고 큰일 나면 너는 여기서 어떻게 회사를 다니고 살겠냐며 한국 가서 맑은 공기 마시면 된다고 억지를 부렸다. 저녁마다 숙소에 있는 공기청정기가 요란한 경고음을 울리며 나를 거대한 오염 물질로 인식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여행 일정이 연말이어서 12월 31일 밤 우리는 함께 서른 살이 되는 새해를 맞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이상하게도 11년 전 그 말이 씨가 된 건지, 우리는 그날 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다. 삼십 대가 뭐 별거냐고 쿨한 척하다가도, 서울보다 30분 늦췄다며 어린 애마냥 좋아하며 따뜻한 새해를 맞이했다. 30분 정도 늦출 수는 있지만 서른 살이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삼십 대가 된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11년 후에 결혼한다던 S가 여전히 싱글이어서 다행이었지만, 차마 40대가 되는 밤에도 함께하자고 말할 수는 없었다.


4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직장에서 또 한 번 슬럼프를 겪고 있지만 그때처럼 징징대거나 과하게 감성에 젖지는 않는다. 우울하고 힘든 밤은 여전히 찾아오곤 하지만, 한 발로는 버티면서 또 한 발로는 새로 내딛을 방향을 이리저리 더듬어 볼 줄 아는 균형감각이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은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마스크 없이는 거리를 활보할 수 없다. 아니, 활보해서는 안 된다. 두 뺨으로 온전히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는 날이 어서 빨리 오기를 모두가 염원하고 있지만, 그때처럼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허세를 부리지는 않는다. 답답해도 써야 하면, 써야 하는 거다. 고집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못 견디게 싫어도 견뎌보는 것, 우리가 30대 중반까지 열심히 함께 걸으며 생긴 굳은살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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