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동생, 네가 맞았어.
feat. 윤딴딴의 '윤딴딴'
나에게는 두 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어렸을 때부터 함께 붙어있는 시간이 많았다.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 때도 있었지만, 집에서 둘이 붙어 앉아 새로운 놀이를 개발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물론 중심 잡기가 매우 어려운 동작을 몇 개 만들어서 몇 분씩 버텨야 한다든지, 윷놀이판이나 부르마블 게임판을 조잡스럽게 개조한다든지, 집에 있는 온갖 물건으로 만들어 놓은 장애물 코스를 제한 시간 내에 돌아와야 한다든지 하는 유치한 놀이가 대부분이었지만, 우린 그저 눈뜨면 같이 놀 친구가 항상 옆에 있다는 게 좋았다.
우리에게 조금씩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 건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엄마는 자녀 교육열의 온도를 항상 80도 정도로 맞춰 중불을 지피셨는데, 100도에서 팔팔 끓지는 않지만 80도에서 한 번도 내려온 적은 없어서 워킹맘의 강인한 끈기와 인내를 보여주었다. 엄마가 언젠가 드라마 <스카이캐슬>을 보면서 저렇게 악바리로 안 키워도 애들 잘만 큰다고, 마치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한 깨어 있는 엄마였던 것처럼 이야기한 적이 있다. 공교육과 사교육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자유를 허락한 것은 맞다. 엄마가 악바리로 안 키웠다는 말은 어떤 학원을 다니든, 어떤 학습지를 구독하든 다니기 싫어하거나 하기 싫어하면 설득하지 않고 딱 끊어버리곤 했다는 건데, 사실 나는 그게 더 무서웠다. 어린 마음에 언젠가 엄마가 그 단호함으로 나를 딱 끊어버리는 건 아닌가 괜히 겁도 날 정도의 단호함이었기 때문이다. 싫다고 징징대는 아이 손목을 끌고 학원으로 데려가는 엄마들과는 조금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꽤 성공적인 전략이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여러 가지 학원을 다니는 동안에도 언제나 남동생과 나는 둘이 함께였다. 처음 함께 다녔던 학원은 미술학원. 둘 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던 때인데, 거기서부터 남동생의 고난이 시작됐다. 하라는 그대로, 정석대로 따라하며 칭찬받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선생님이 오리를 그리라면 선생님의 머릿속에 있을 그 오리 그림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리려고 온 집중력을 발휘했지만, 동생은 달랐다. 동생의 스케치북에는 오리인지, 백조인지, 유니콘인지 모를 무언가가 총천연색의 깃털 옷을 입더니, 날이 갈수록 그림이 추상화에 가까워졌던 것 같다. 게다가 미술학원에서도 새로운 놀이를 개발하겠다며 학원에 있던 미술 도구들을 온갖 놀이 도구로 이용해 박력 넘치는 행위 예술을 하곤 했다. 결국 선생님은 엄마에게 동생을 더 이상 가르칠 수 없으니 제발 보내지 말아달라는 전화를 했다. 부모님에게 남동생이 아픈 손가락이 되었던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피아노학원에서는 바이엘을 치다가 악보를 안 보고 건반을 마치 난타처럼 두드리기만 했고, 수영학원에서는 물에 뜨는 법을 익히자마자 자유형, 평영 등의 정해진 수영 기법을 익히기보다는 이리저리 라인을 건너뛰며 수영장 밑바닥까지 잠수해가며 탐험하기를 즐기다가 선생님들의 진을 빼 놓았다.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여기저기 기어 올라가 날 수 있다고 뛰어내리다가 턱이 찢어져 피가 철철 나기도 했다.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동생의 충격적인 행동들을 보며 나도 동생을 이해할 수 없는 때가 많았다. 동생은 이해력이 떨어지고 주의 집중력이 산만하다는 낙인 때문인지, 그다지 잘못한 일이 아니어도 부모님한테 혼나기 일쑤였다. 나는 늘 그 옆에 함께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동생의 편을 들어줄 만큼 성숙하지도 못했고, 대조 효과로 칭찬을 독차지했던 내가 동생에게 얼마나 미웠을지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태권도 학원을 다닐 때쯤 동생이 나에게 덤빈 적이 있었다. 나는 결국 학원에서 배운 돌려차기의 정석대로 남동생을 거실 바닥에 한 바퀴 돌려 쓰러뜨리고 말았다. 그때 처음으로 동생의 타오르는 눈빛과 빨개진 볼이 공포스럽다고 느꼈지만, 제발 동생이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동생의 기이한 행동들은 중2병을 앓으며 정점을 찍었고, 고등학생 때는 중2병의 세 배쯤 업그레이드 된 광풍의 사춘기를 겪으며 감정 기복이 더 심해졌다. 끊임없이 자기를 골칫거리로 취급하는 가족들을 향해 화를 내다가 자기 주먹으로 벽을 쳐서 깁스를 한 적도 있었다. 엄마의 식지 않은 교육열 덕분에 동생이 공부를 아주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재수를 하게 됐다. 나중에 재수를 하고 입학한 대학 동기들이, 재수를 안해봤으면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정신적 고생담을 늘어놓는 자리에서 동생이 왜 그렇게 예민하고 뾰족하게 굴었는지를 겨우 이해했다. 그전까지 나는 그런 동생을 안쓰럽게 여기거나 이해해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야속한 누나였다. 그저 빠듯한 살림에 성인이 된 동생의 학원비에 용돈까지 부담하던 부모님을 보며 동생이 밉기만 했다. 그래서 동생과 나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초등학생 때처럼 거실에서 발차기를 하는 싸움은 아니었지만 입으로 하는 싸움이 훨씬 상처가 컸다. 결국 근 1년 가까이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자는 휴전 협정을 맺고 정말 수능이 끝나는 날까지 단 한 번도 말을 하거나 눈을 마주친 적 없이 지냈다. 중고등학생 때 내내 기타만 끌어안고 방에서 베짱이처럼 누워 지내던 동생을 보았기 때문에 응당 그런 시간에 대한 벌을 달게 받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부모님은 동생 걱정으로 이전보다 더 밤잠을 설치셨다.
그러나 가족들의 걱정과는 달리, 1년 뒤 동생은 이름을 알 만한 대학에 합격했다. 집에서 컴퓨터로 합격 사실을 확인한 동생이 전화를 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누나, 나도 이제 대학생이야!”
하는 순간, 이상하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턱끝까지 차오른 미안함과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를 잃었던 헛헛함이 한꺼번에 눈물이 되어 흘렀다. 집안이 축제 분위기여서 우리의 휴전 협정은 그다지 낯간지러운 장면 없이 종전 선언에 이르렀다. 동생이 재수학원에서 겪은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와 함께, 1년 먼저 새내기로 살았던 나의 대학 생활 이야기를 나누느라 그날 우리는 밤을 꼬박 새웠다. 시트콤같았던 동생의 유년기가 재수학원에서는 스릴러였다가, 호러였다가 잠시 멜로였다가, 결국 대학에 합격한 성공드라마로 바뀌어 있었다. 동생은 어떤 이야기든 사람을 빨려들어가게 만드는 말솜씨가 있었다. 나에게는 없는 재능이었는데, 그게 대학에 들어가기까지는 어떤 어른에게도 전혀 쓸모 없게 보였나보다. 듣다가 웃겨서 몇 번 기절도 하면서 그렇게 회포를 풀었다.
대학에 합격한 후에도 동생은 평범하지 않았다. 집에는 MT를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서울역에 가서 하루 이틀 노숙자 아저씨들과 어울리기도 했고, 어느 날은 만취 상태로 홍대 근처 길바닥에 누워 돌처럼 움직이지 않는 바람에 아빠가 자다 일어나 차를 끌고 출동해야하는 날도 있었다. 레포트를 쓰면 여기저기 맞춤법이 틀려 내가 첨삭을 해야 하는 일도 많았다. 대학만 가면 뭐하냐며 갈등이 다시 시작되는 듯했는데, 그런 동생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건 군대에 가고 난 다음이었다. 제대가 얼마 안남은 병장 때였던 것 같다. 동생이 보낸 편지를 받고 나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저 안부를 묻는 편지였는데, 나는 눈물이 핑 돌다가 동생이 쓴 편지가 진짜 맞는지 몇 번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던 것 같다. ‘누나, 누나는 누나대로 누나의 성향에 맞춰서 열심히 살고 있던 건데 나는 그냥 누나가 나를 이해해주길 바라는 어리광에서 자꾸 미운 말들이 입에서 튀어나왔던 것 같아. 군대에서 말년이 다 돼 가니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져서 계속 자아성찰만 하게 돼. 나는 내가 진짜 왜 태어났는지, 뭘 하면서 살아야 가슴이 답답하지 않을지 정말 미치게 궁금했어. 이제 부모님 속 그만 썩여야지.’ 이런 내용을 포함해 A4 용지 열 장쯤 적혀 있던 그 편지는 그 어떤 에세이보다도 울림이 있었고, 매끄럽게 정돈된 문장으로 내 마음을 녹였다. 맞춤법만 틀리는 게 아니라 문장력도 없던 동생이 도대체 무슨 일인가, 누나에게 편지 쓰겠다고 설마 대필까지 한 건가 싶었는데, 동생의 말로는 군대에 있는 동안 거의 800권 가량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읽기만 잘 되면 쓰기 교육은 따로 필요없다는 내 주장의 산 증인이 바로 동생이다.) 병장이 되니 너무 할 일이 없어 들러본 도서관에서 문득 제대 전까지 거기 있는 책을 다 읽어버릴까 하는 똘끼섞인 다짐을 했단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활자에 중독된 것처럼 초코파이 받으러 따라간 교회의 주보까지 정독해서 읽게 되었다는데, 동생은 그 에세이 같은 편지의 다짐처럼 전역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기타를 튕겨대더니 방에서 작곡한 노래로 저작권을 등록했고, 작은 광고 공모전에서 상을 받기도 했으며, 지금은 어느 중견기업의 기획마케터로 일하며 개성 있는 프레젠테이션으로 주변에 찾는 이들이 끊이질 않는다. 동생에게는 나처럼 정해진 길을 성실하게 걸어간 사람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골칫거리라 불리면서 방황하는 동안 동생은 어쩌면 자기만의 길을 만드느라 그토록 불만에 가득 차 있었고, 괴로웠고, 답답해했던 게 아닐까. 동생이 취업하기 전, 작곡한 노래의 저작권을 등록하러 간다길래 나는 그 당시 한창 유행했던 오디션 예능 프로그램 ‘K-POP스타’에 나가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동생이 나를 보며,
“누나, 진짜 좋아하는 일은 누구한테 평가받고 싶지 않은 거야. 당신 노래 어때요, 이래요, 저래요 소리를 듣는 시간에 나는 그냥 내가 좋은 시간을 즐길거야.”
나는 또 한번 멍해졌다. 동생의 아름다운 성장기를 그저 한심하고 철없는 긴 방황기로만 여겼던 나는 인정욕구에 가득 찬 속좁고 별 볼 일 없는 누나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윤딴딴의 ‘윤딴딴’ 노래 가사는 동생의 방황기와 꼭 닮아 있다. ‘너무 찌질한 내 어린 시절에도 한 줄기 빛이 비추는 날이 있을까 / 엄마 아빠 속 썩이지 말자 또 사고 치지 말자 딴딴해지자 튼튼해지자 똘똘해지자 / 너무 찌질한 내 푸른 시절에 생각했지 ……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하는 가사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딴딴한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 가족마저 알아주지 않아도 힘겹게 고군분투했을 동생의 목소리 같다. 그래서 나는 요즘 동생을 보며 나를 자꾸 되돌아보곤 한다. 그리고 같은 편이 되어 주지 못하고 외롭게 한 시간이 한없이 부끄럽고 미안해진다. 우울한 어느 날에는 기발하고 재치있는 말로 위로해주는 동생이 있어 고맙고 든든하다.
♬윤딴딴 '윤딴딴'
작곡, 작사, 노래 윤딴딴
나 어렸을 때 골칫거리 맨날 아팠지
엄마 아빠도 늘 잠을 못 주무셨어
그 때 느꼈지 아 사람은 튼튼해야 하는구나
운동 열심히 하고 밥도 맛있게 먹고
나 중학생 때 친구 녀석
이층에서 뛰어내리면 천 원 준대 혹 했지
두 다리 다 부러졌어
그 때 느꼈지 아 사람은 딴딴해야 하는구나
너무 찌질한 내 어린 시절에도
한줄기 빛이 비추는 날이 있을까
나도 이쁜 애랑 사귀어 보고 싶은데
내가 어떡하면 괜찮은 놈이 될까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
딴딴해지자 튼튼해지자 똘똘해지자
엄마 아빠 속 썩이지 말자
또 사고 치지 말자
딴딴해지자 튼튼해지자 똘똘해지자
하루하루 그렇게 살다 보면
정말 뭐라도 되지 않을까
나 스무 살 때
옷도 사고 머리도 세워보고
결국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었어
그 때 느꼈지 아 안 되는 건 있구나
너무 찌질한 내 푸른 시절에 생각했지
내가 제일 잘하는 건 뭘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뭘까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
딴딴해지자 튼튼해지자 똘똘해지자
엄마 아빠 속 썩이지 말자
또 사고 치지 말자
딴따라하자 딩가딩가하자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 전하고
노래하면 정말 뭐라고 되지 않을까
딴딴해지자 튼튼해지자 똘똘해지자
엄마 아빠 속 썩이지 말자
또 사고 치지 말자
딴따라하자 딩가딩가하자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 전하고 노래하면 언젠가
딴따라할래 딩가딩가할래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 전하고
노래하자 기쁨 슬픔이 돼 주자
딴딴히 가자 천천히 가자 길게 보자
하루 하루 그렇게 살다 보면 정말 뭐라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