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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승 Jun 23. 2021

극단의 지점에서 질문을 던지는 작가, 장강명

<나무가 됩시다>와 <표백>, 그리고 <한국이 싫어서>

    최근에 <서울리뷰오브북스>라는 서평 잡지를 알게 됐는데, 1호 뒷부분에 실린 짧은 소설을 하나 읽었다. 처음엔 귀퉁이에 적힌 '짧은 소설'이라는 글자를 못 보고 그냥 장강명 작가가 쓴 글이라길래 다른 글들을 제쳐두고 먼저 펼쳤다. 제목이 '나무가 됩시다'인데다가 잡지가 '서평' 잡지니까, 장강명 작가가 쓴 서평이거나 아니면 잡지사의 의뢰를 받고 쓴 칼럼일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 글이 '그린 라이프 수술'을 받은 사람이 쓴 리얼하고 디테일한, 조금 섬뜩하기까지 한 후기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런 게 생겼다고? 혼잣말을 하면서 네이버에 '그린 라이프 수술'을 검색했다.  픽션이었다. 나처럼 낚인 독자들의 후기만 있었다. 낚였다는 허탈함과 함께 묘한 안도감도 느꼈다(최근에 이와 비슷한 실험이 성공했다는 기사를 읽기는 했지만). 글 속에서 '그린 라이프 수술'은 육식도 채식도 필요없이 필요한 양분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나무같은 인간이 되도록 성인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수술이다. 개념 정리를 해 놓고 읽어 보니 적어도 지금은 확실히 픽션이 맞는데,  워낙 그럴듯한 생물학적 지식과 구체적인 수치들을 들어가며 써놓는 바람에, 순진하게 검색까지 하고 말았다. 최근에 등장한 코로나19 확진자의 실제 증상 기록이나, 백신 접종 후 일일 증상 기록을 읽어 왔던 경험이 기시감으로 작용해 픽션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 건가 싶기도 했다. 사실 소설인 걸 알고 읽었더라도, 실제로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는 과정의 비슷한 개념을 상상력으로 구체화시킨 건지 궁금해서 찾아봤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남은 부분을 마저 읽는 동안에는, 이토록 정교하게 없는 수술까지 만들어내면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가를 찾는 데 집중했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그린 라이프 수술을 받은 '나'는 육식과 채식, 그리고 배양육마저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싶으며, 내가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는 확실한 도덕적 명령은 '살생하지 말라'는 것이다. 식물 역시 생명이므로 나는 식물을 죽이고 싶지 않다. 동물의 알을 먹지 않는 것처럼 곡물이나 씨앗을 먹는 일도 피하고 싶다. (193쪽)
배양육 역시 살아 있는 생명이다. 요즘은 맛을 더 사실적으로 내기 위해 인공 뼈를 만들 때 골수와 신경을 만들기도 한다. 이 생명에 뇌가 없다고 해서 죽여서 먹어도 괜찮다는 논리는 내게 이상하게 들린다. 그 논리를 조금 더 확장하면 동물성 플랑크톤이나 신경계가 엉성한 무척추동물들도 식용으로 괜찮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런 식으로 경계가 조금씩 무너진다. 시신을 이용한 인육 요리라고 안될 것 뭐 있겠는가.(193쪽)


'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존재에 해를 끼칠 필요가 없는 완벽한 삶을 지향한다. 잔인한 공장식 축산을 거부하려면, 공장식 농업을 포함하여 배양육, 단백질 작물과 같은 것들도 전부 거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이어야 하나 싶으면서도 그가 제기하는 문제의 논리적 설득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동물권과 비건 생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련 책들도 쏟아져나오고 있다. 물론 관점이 서로 미세하게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묶어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책들을 읽다보면 반려동물을 좋아할 수 없거나(알러지나 공포증 등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육식을 끊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구에 유해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진 적이 있다. 동물 복지의 측면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어쩐지 웬만하면 모두가 '페스코 베지테리언'의 단계를 밟아서라도 종국에는 완전 무결한 비거니즘의 베지테리언이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위에 인용한 문장의 '경계가 조금씩 무너진' 채식이 용납될 수 없는 경우에는 결국 모든 생명체가 서로를 위협하지 않고 지구에 공존하기 위해 스스로 양분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러나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은 생태계에 저항하는 가장 위험한 도전이 아닌가. '극단의 지점에서 질문을 던지기'는 장강명 작가의 소설에서 자주 발견했던 문제 제기의 방식이다.   


    그의 등단작 <표백>에서 그가 선택한 '극단'은 '자살 선언'이었다. '20대의 자살 선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표백>에서 20대는 '표백 세대'로 명명된다. '표백 세대'는 더 이상 체제 전복이나 혁명을 위한 질문은 접고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가 허용하는 작은 성취들에 만족하는 개인으로 적절히 순응하거나 타협하도록 강요받는 세대를 의미한다. 여전히 작은 가치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충돌이 혁명의 에너지로 누적되거나 폭발할 정도의 사회는 아닌, 이미 완성된 세계에서의 경쟁에 성공하는 젊은이들은 스스로 발빠르게 표백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던 이들이다. 이들처럼 성공적으로 순응하거나 적어도 타협하지 못한다면, 패배자가 되어 밀려나거나 방향성을 잃은 무논리의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


    <표백>은 '정세연'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표백 세대가 마주할 삶의 모든 선택지를 거부하기로 결심한 '20대의 자살 선언'을 다룬다. 등장인물 중 최초로 자살을 하는 '정세연'은 자살 이후 자신을 '재키'라는 가명으로 3인칭화 해서 작성한 잡기(雜記)를 남기는데, 표백 세대에게 '자살'과 '자살 선언'이 가지는 가치에 대해 나름의 논리적인 주장을 펼친다. 그녀는 그녀의 자살이 그저 고단한 현실을 비관한 도피성 자살로 치부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대학교 4년 장학생 신분으로 대기업 입사에 막 성공한 시점에서의 죽음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녀는 사회에 분명히 거부 의사를 밝힘으로써 충격과 위기감을 주려면 그런 계획적 자살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함을 주장하면서, 자살을 권유할 젊은 친구들을 지목한다. 그녀가 사후에도 잡기를 통해 친구들이 자살 선언을 완수하도록 치밀하게 조종하는 과정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독자는 그들의 자살 선언에 반박하고 싶으면서도 막상 시원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겠고, 그런데도 계속 읽게되는 찝찝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찝찝함이 곧 작가가 의도한 것임을 알면서도 작가에 대해 불편한 감정이 들지 않는 것은, 소설의 화자가 '정세연'이 아니라 '나'이기 때문이다.


    총 다섯 명의 젊은이가 자살하지만,  끝까지 살아남는 인물은 기자인 '휘영'과 공무원인 '나'다. '휘영'은 꼭 위대한 일이 아니더라도 인정 욕구나 자부심을 충족시킬 만한 작고 소소한 기쁨을 추구하는 삶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살 선언에 대한 반론을 준비하지만, 그의 삶에 드리운 우울의 그림자가 명확히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정세연' 대신에 자살 사이트를 운영하던 그녀의 동생 '정세화'에게 3년 안에 멋진 일을 보여주고 근사한 제안도 할 수 있다는 애매모호한 결심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철저히 보통 사람으로서 생활에 기반을 둔 일을'(331쪽) 하면서도 그녀들 못지 않은 치밀한 반박의 논리를 갖추기 위해 나아갈 것을 결심한다. 공무원 연금이나 고용안정성을 포기하고 사표를 제출해야 할 시점이 오더라도, 결코 끝나지 않을 사회의 각종 모순 앞에 해야 할 역할이 있음을 막연하게나마 인지한다. '나'는 '표백 세대'로서 살아서 해야 할 일들,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장강명 작가는 10쇄를 맞이하여 쓴 작가의 말에서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자살 선언을 반박한다. (초판 1쇄 작가의 말에서는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우선 첫째, 저는 '위대함'은 실제로는 별 중요한 의미가 없는, 고리타분한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생략)… 위대함은 삶의 목표로 추구하기에 적당한 가치가 아닙니다. (346쪽)
둘째, 저는 현대에 대단히 중요한 과업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략)… 종교에 근거를 두지 않은 보편적인 윤리체계를 만드는 일, 국가‧대륙 간에 존재하는 부조리한 삶의 질 격차를 없애는 일, 경제의 활력을 해치지 않으면서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일 등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업을 많습니다. (346~347쪽)
셋째로, 저는 과업과 무관하게 사람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표백>을 쓰고 난 뒤 저는, '위대한 일'에 집착하는 세연과 달리, 남들이 무가치하다고 무시하는 일에 매달려 끝내 의미를 찾아내고야 마는 주인공에 대해 3년 안에 쓰려 했습니다. 그렇게 쓴 소설이 <열광금지, 에바로드>입니다. (후략)  (347쪽)


    위의 작가의 말을 쓴 같은 해, 그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가 출간되었다.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떠나는 주인공 '계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아프리카 초원 다큐멘터리에 맨날 나와서 사자한테 잡아 먹히는 동물 있잖아, 톰슨 가젤. 걔네들 보면 사자가 올 때 꼭 이상한 데서 뛰다가 잡히는 애 하나씩 있다? 내가 걔 같애. 남들 하는 대로 하지 않고 여기는 그늘이 졌네. 저기는 풀이 질기네 어쩌네 하면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다가 표적이 되는 거지. / 하지만 내가 그런 가젤이라고 해서 사자가 오는데 가만히 서 있을 순 없잖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은 쳐 봐야지. 그래서 내가 한국을 뜨게 된 거야. / 도망치지 않고 맛서 싸워서 이기는 게 멋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 … …. 그래서, 뭐 어떻게 해? 다른 동료 톰슨 가젤들이랑 연대해서 사자랑 맞짱이라도 떠?(11~12쪽)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 '계나'는 <표백>의 '정세연'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국에서 '표백 세대'로 살아가는 삶을 거부하고 있는 인물이다. 쉽게 순응할 수 있는 길을 거부하고, 자기 정체성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는 행위로 말이다. '계나'가 호주에 가서 새로운 '호주 톰슨 가젤'이 되어 '호주 사자'를 마주하고 또 다른 곳을 찾아야 할지언정, '아프니까 톰슨 가젤이다'하는 말에 속아서 안주하지는 못하겠다는 선언.


    장강명 작가가 만들어 낸 극단의 지점에서 방황하고 행동하는 인물들이 있어서, 그가 던진 질문에 답을 찾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조금은 덜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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