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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승 Jul 20. 2021

<완전한 행복>, 행복에 관한 가장 소름돋는 이야기

완전무결한 행복에 대한 욕망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다 읽고 나면 표지 그림에 있는 장화 색깔만 봐도 무섭다. 세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는 순간 서늘해질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스포일러 주의)


    저녁 먹고 호기심에 펼쳤다가 새벽 네 시반까지 마지막장을 넘기고 뻗어버렸다. 책 내용이 아무렇게나 뒤엉킨 악몽까지 꾸는 바람에 늦잠자고 일어나 한참 컨디션이 몽롱했지만, 500쪽 넘어가는 소설을 빨려들어가듯 단번에 읽어버린 건 정말 오랜만에 있는 일이라 다 읽은 책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한동안 이런저런 상념에 잠겼다. 


    여주인공은 병리적인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진 인물로, 완전무결하게 행복한 삶에 대한 강박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이어간다. 주변 인물들의 화법을 통해 서서히 드러나는 주인공의 충격적인 정체를 감당하기가 어려워 중간중간 숨이 막혔다. 주인공이 벌이는 일련의 사건 자체만 놓고 보면 뉴스에서 꽤 여러 번 접했던 사이코패스 범죄를 떠올리게 하지만, 정유정 작가의 문장은 신선하면서도 치밀한 심리 묘사로 독자를 작중 상황 한가운데로 깊숙하게 몰아넣는다. 독자가 주인공에 의해 고통받고 파멸해가는 주변 인물들 틈에 서서 서늘한 압박감을 경험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소설 초반부에 그녀가 심어놓은 '설마'의 감정과 의심의 씨앗이 순식간에 발아하여  무시무시하게 가지를 치는데, 500페이지를 다 넘겨가며 거대한 어둠의 진실을 확인하는 동안 '완전무결한 행복'은 공포 그 자체로 다가온다. 그녀가 행복을 욕망하는 비뚤어진 방식이 주변 인물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결국 자기 스스로를 행복과 정반대의 길로 몰아간다는 사실을 그녀는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반달늪으로 표상되는 그녀의 내면은 춥고 어둡고 불길하기만 하다.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다소 식상해보이는 질문의 가장 소름돋는 버전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적어도 그 질문의 답이 신유나의 뺄셈 행복론은 아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행복을 위해 불행의 가능성을 모조리 없애는 것은 자신을 불행의 가장 한가운데로 몰아붙이는 파멸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바로 얼마 전에 장강명 작가의 데뷔작 <표백>을 읽었는데, 처음에는 <완전한 행복>의 신유나를 보고 <표백>의 재키를 떠올렸었다. 주변 인물을 치밀하게 가스라이팅하고 파멸로 몰아간다는 점에서 일면 닿아있지만, 신유나의 가스라이팅은 재키의 그것과는 그 동기와 맥락에서 전혀 차원이 다르다. 신유나가 재키와 구분되는 지점에는 사회적 문제가 거세된 극단적인 자기애와 실패의 가능성조차 용납하지 않는 행동형 완벽주의가 있다. 정유정 작가가 그녀에게 재키처럼 괴변이라도 펼쳐볼 기회를 허락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그걸 허락했다 하더라도 신유나에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논리는 '나의 완전한 행복을 위하여' 말고는 없다. 그걸 방해하는 사람들을 직접 처단하는 처절한 '노력'이 그녀가 보여주는 소름돋는 생의 의지다. 꼭 범죄행위를 포함하지 않더라도 50-60% 신유나를 닮은 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경험적 사실을 떠올려볼 때, 행복한 삶을 위한 아주 기본적인 조건은 위험한 나르시시스트를 분별하여 빠르게 손절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아가 또다른 후천적 신유나를 성장시키는 일에 동참해서도 안된다.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결핍과 실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강한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유연하지만 단단한 자기애와 자존감을 형성하는 것이 행복의 유일한 열쇠다. 

월간 <채널 예스> 7월호 커버스토리는 정유정 작가의 이야기다. 신간을 바로 읽으면 작가 인터뷰와 작품에 대한 영상들을 쉽게 접할 수 있어서 독후 활동이 풍성해진다.

    중학교 때 아빠한테 <열한 살 정은이>라는 책을 선물받았는데, 80년 광주를 배경으로 아빠와 딸이 응어리진 갈등을 풀고 화해에 이르는 장면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던 기억이 있다. 사춘기에 아빠와의 관계가 한창 어려웠을 때였는데, 그 책을 선물한 아빠의 진심을 깨닫고 뭔지모를 나의 죄책감이 책 속의 서사와 뒤엉켜 몇 배로 불어나는 바람에 더 오랫동안 울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신간 발표만 하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정유정 작가의 첫 책이 <열한 살 정은이>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 얼마 안됐는데, 그땐 그 정유정이 이 정유정이었어? 하고 꽤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나중에 알고보니 간호사로 일하다가 그만두고 공모전에 무려 11번 떨어지는 동안 수상이력 없는 작가로서 출간했던 첫 책이 <열한 살 정은이>였고, 등단 이후에는 작가 스스로 절판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그 책이 소설이라 부르기에 부끄러울 정도로 부족한 글이었다고 말하면서 더는 찾아볼 수 없을거라고 했지만, 내 기억 속에 그녀의 책은 아빠와의 뜨끈하고 애틋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공모전 심사위원이나 작가 스스로 인정했느냐의 문제와 별개로, 독자의 삶의 어떤 중요한 순간에 의미 있게 기억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글은 가치를 지닌다.  20년 뒤에 다시 그녀의 책으로 밤을 새게 될 거라고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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