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승 Jul 26. 2021

짙은 초록색과 나무 향기가 배어나오는 여름 소설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스포일러 주의)


    책을 덮어도 짙은 초록색과 나무 향기가 배어나온다. 창문을 열어두고 읽다보면 매미 소리가 창밖에서 들리는 건지 책 속에서 들리는 건지 헷갈린다. 이제껏 만난 적 없는 감각적 묘사로 오감 독서를 선물해준  마쓰이에 마사시의 장편 소설. 한적한 아오쿠리 마을의 아사마 산을 바라보는 여름 별장에서 무라이 슌스케라는 건축 장인을 중심으로 그를 따르는 설계사무소 직원들의 담담한  일상이 큰 사건이나 긴장감 없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책장을 끝까지 넘기게 만드는 것은 묘사의 힘이다. 울창한 숲과 나무, 온갖 새소리, 꽃과 곤충들을 묘사하는 문장들은 인위적으로 표현력을 과시하는 부자연스러움이 전혀 없고,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대자연에 차분히 녹아들게 만든다. 또한 건축물에 대한 묘사가 디테일하게 이어져 읽는 내내 상상 속의 집을 지었다가 허물었다가를 반복하는 재미가 있다. 모델이 되었다는 실제 건축물 사진들을 인터넷으로 찾아보며 상상했던 것과 비교해보기도 했다.

초록색 종이 표지 속에는 나무 무늬의 양장본이 숨겨져 있다. 


    전통과 현대가 멋스럽게 조화를 이룬 공간, 수줍은 듯 단정하게 사람의 손길과 숨결을 기다리는 공간, 오랜 시간이 흘러도 마감 한 끝 한 끝에서 설계한 사람의 배려가 느껴지는 공간. 무라이 슌스케는 이런 공간을 지향하며 설계한다. 집은 집주인의 직업과 취향을 고려한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구조로 설계될 때 제대로 된 안식처로 기능하며 살아숨쉬게 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화려한 외관으로 위용을 과시하는 후나야마 게이이치의 그것과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다. 건축에 대한 그의 신념은 그대로 그의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설계사무소를 키워 명예를 얻고 돈을 버는 일보다  신념을 잃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일을 맡아 집주인에게 그 신념을 온전히 집의 형태로 전달하는 일에 가치를 둔다.


    무라이 슌스케는 여름 별장에 무섭게 몰아치는 태풍처럼 그 어느 때보다 공을 들여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경합을 준비한다. 좀처럼 경합에 응모하는 일이 거의 없었던 그에게 이례적인 일이다. 그게 마지막 설계가 될 것을 미리 예감하고  있어서였는지, 평생을 고수해오던 건축 신념을 뛰어넘은 일생의 대작을 만들겠다는 욕심에서였는지, 또는 후나야마 게이이치라는 라이벌을 의식해서였는지 알 수 없다. 셋 다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경합에 응모할 설계를 준비하는 동안 사카리니를 포함한 직원들 모두가 각자의 재능을 끌어모아  무라이 설계사무소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셈이다. 그 마지막 불꽃의 배경이 된 여름 별장과 별장을 품고 있는 울창한 숲은 곧 무라이 설계사무소가 지향하는 세계나 다름없다.  별장 앞의 원형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계수나무에는 계절마다 온갖 새들이 찾아왔다가 떠나간다. 건축을 설계하러 오는 의뢰인을 자기 신념대로 맞아들이고 떠나보내는 우직한 무라이 슌스케처럼.  그를 존경하는 신참 사카리니는 2층 서고에서 머물며 매일 아침 계수나무 방향으로 난 유리창을 열고 새소리를 듣고  여름향기를 들이마신다. 사카리니는 무라이 슌스케를 사장님이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건축가로서의 그의 신념에 가 닿기 위한 걸음마를 시작한다. 별장이 있는 아오쿠리 마을은 오랜 시간 별장들이 즐비한 쉼의 공간이었으면서도 자연을 과하게 훼손하지 않고 별장 주인들의 이야기와 자연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있다. 그곳에서 무라이 슌스케는 일생의 내공을 한 데 모아 작업에 집중하는 한편, 묵묵히 그러나 꽤 날카롭게 직원들을 관찰한다. 함께한 시간이 1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막내 직원 사카리니에게 건축가로서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을 완고함을 발견해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긴 휴식에 들어가는 무라이 슌스케의 모습은  위대한 건축가이기도, 위대한 스승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의 마지막 설계도는 애초부터 경합에서의 승리만을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직원들의 마음 속에 깊이 각인시킬 그의 마지막 숨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유독 마음에 드는 문장이 많았던 소설이다. 


안개 냄새에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하얀색이 아니라 초록색일 것이다.(10쪽)
 
여름 별장에서 지내는 동안, 여닫이가 나쁜 문짝 같던 내 행동거지가 조금씩 덜컹거림이 줄어들면서 레일 위를 매끄럽게 옴직이기 시작한 것같이 느껴졌다.(47쪽) 

"잘된 집은 말이야. 우리가 설명할 때 했던 말을 고객이 기억했다가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게 되지. 우리 건축가들의 말이 어느 틈엔가 거기 사는 사람들의 말이 되어 있는 거야. 그렇게 되면 성공인 거지."(60쪽) 

목소리란 참 이상하다. 목적도 마음도 그대로 드러난다. 유키코의 온갖 것이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것 같고 그 모든 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목소리는 사람을 잘 설득한다. 귀에 쉽게 들어오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여전히 설명으로는 다 할 수 없는 부분이 조금 남는다. 그 조금 남아 있는 것이 사람을 매료시킨다. 말의 의미 그 자체보다도 소리로서의 목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아닌가?(62쪽)  

마리코의 미소는 보내는 상대가 누구인지 언제나 확실하다. 그런데 유키코의 웃음은 그냥 그 자리에 스며나와서, 누가 받든 말든 상관없어 보인다. 그것은 유키코의 특이한 온화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과 비슷했다.(168쪽) 

"혼자서 있을 수 있는 자유는 정말 중요하지. 아이들에게도 똑같아.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평소에 속한 사회나 가족과 떨어져서 책의 세계에 들어가지. 그러니까 책을 읽는 것은 고독하면서 고독하지 않은 거야. 아이가 그것을 스스로 발견한다면 살아가는 데 하나의 의지처가 되겠지. 독서라는 것은, 아니 도서관이라는 것은 교회와 비슷한 곳이 아닐까? 혼자 가서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장소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야."(180~181쪽)

비를 맞거나, 태양에 이글이글 타거나, 강한 바람을 맞으면 그것을 견뎌내는 것만도 벅찼지. 그러나 움막이라면 아주 잠시라도 밖을 바라보기도 하고 불을 멍하니 보는 여백 같은 시간이 있었을 거야. 인간에게 마음이 싹튼 것은 그런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집 안에 계속 있으면 점차 견딜 수가 없어져서 밖에 나가고 싶고, 자연 속을 걷고 싶고, 나무와 꽃을 보고 싶고, 바다를 보고 싶다고 원하게 되지. 인간의 내면 같은 것은 나중에 생긴 것으로 아직 그다지 단단한 건축물은 아니라는 증거일 거야. 집 안에서만 계속 살 수 있을 만큼 인간의 내면은 튼튼하지 못해. 마음을 좌우하는 걸 자기 내부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찾고 싶다, 내맡기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337쪽)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김영하북클럽 추천도서로 알게 된 책인데, 이번 달 마지막 날에는 김영하 작가가 직접 이 책을 주제로 라이브 방송을 연다고 하니 독서의 여운을 더 길게 늘여서 오래 즐겨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완전한 행복>, 행복에 관한 가장 소름돋는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