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승 Jul 30. 2021

성실한 기록은 별 것 아닌 일상에 빛이 나게 한다

마운틴 구구  <하와이 수영장>,  <대파와 물안경>

    글을 쓰는 사람의 일상에서는 빛이 난다. 위대한 작가에게 후광이 비춘다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 멋져보인다는 그런 뜻의 문장이 아니다. 그 빛은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글을 쓰는 사람 자신에게만 보이는 빛이다. 글을 쓸 생각을 하지 않고 흘러가는대로 살다보면 바로 어제 일도 생각이 잘 안 날 때가 있다. 누구를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눴고, 그 때 그 사람 표정이 어땠는지, 길을 걷다가 스쳐지나간 풍경은 물론이고 점심 때 무슨 메뉴를 먹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서 순간적으로 단기 기억 상실증을 의심해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면 오감에 글감을 찾는 필터 같은 게 끼워지고, 무심코 넘길 수 있는 별 것 아닌 일상 속에서도 기록해 둘 만한 의미 있는 것들을 찾아내는 능력이 생긴다. 보이지 않는 빛을 뿜고 있는 사소한 것들을 끌어 모아 문장으로 기록해두면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의 소중한 순간들이 결코 휘발되지 않는다.


    인스타그램에서 금방이라도 풍덩 뛰어들고 싶을 만큼 너무나 시원해보이는 수영장 표지의 독립출판물을 발견했다. 대파와 물안경은 도대체 무슨 조합인가 싶어 <하와이 수영장>을 주문하면서 <대파와 물안경>도 함께 주문해버렸다. 책표지가 이렇게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나 싶게 안 읽고는 못 배기겠어서 원래 읽던 책을 덮어버리고 <하와이 수영장>부터 완독했다. 작가가 2016년부너 2017년까지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수영일기를 엮은 책인데, 제목 때문에 하와이에서 수영한 기록인가 싶었지만 하와이를 떠올리며 매일 수영장에 가는 이야기다. 일단 읽는 내내 자유형이나 배영, 평영, 접영에 이르기까지 헤엄치는 몸짓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읽다보면 머릿 속에서 그려낸 파란 타일 바닥의 수영장에서 '상상 수영'을 하게 되기 때문에 요즘 같은 폭염에 딱 읽기 좋은 책이다.


    <하와이 수영장>을 읽는 내내 초등학생 때 생존 수영을 배운다고 할머니 손잡고 동네 스포츠센터 수영장에 다녔던 생각이 자꾸 났다. 자유형과 배영을 무난히 익히고, 또래 중에 평영 1인자가 되어 스피드를 즐기기 시작할 때쯤 한 마리 새인지 돌고래인지 알 수 없는 유연한 웨이브로 레인을 점령하던 접영의 달인을 만났다. 전국 대회를 준비한다던 중학생 언니였는데, 그 언니의 접영을 보고 있으면 내가 익힌 자유형과 배영과 평영은 수영 축에도 못 드는 것 같았다. 나는 그냥 물에 떠서 안 가라앉고 헤엄만 치고 있는 거고, 언니의 접영만이 제대로 된 수영인 것 같아서 접영 배우는 날손꼽아 기다렸었다. 요즘은 접영 발차기를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는데, 당시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던 남자 수영 강사는 초등학생 열다섯 명 정도를 모두 물 바깥의 타일 바닥에 배를 딱 붙이고 엎드리게 했다. 그러고는 엉덩이만 위로 바싹 올리고 팔과 가슴, 배, 다리는 전부 바닥에 붙이라는 이상한 자세를 시켰다. 이른 사춘기가 막 시작될 때쯤이었던 나는 민망한 마음에 그냥 엎드려 있었는데, 강사가 내 골반과 엉덩이를 마음대로 주무르며 더 위로 올려야 한다면서 들었다놨다 하는 바람에  바로 다음날 강습을 그만뒀다.


    그 뒤로 접영을 떠올리면 언니의 예술적인 몸짓과 수영 강사의 불쾌한 손길이 동시에 떠올라 한동안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디즈니 만화 동산의 인어공주 발차기(꼬리 차기인가…….)만 보아도 접영 발차기가 떠올라서 우울해졌다. 할머니는 물에 빠지면 내가 제일 자신있어 하는 평영으로 살아남으면 된다고 나를 위로하셨다. 그런 기억 때문이었을까. 마운틴구구가 접영을 완전히 터득했다고 조용한 환호를 기록한 부분에서 나는 슬펐다. 성인이 돼서 배우려고 하니 이상하게 수영 강습을 받기가 부끄럽고 민망해서 내 수영은 여전히 평영에서 멈춰 있다. 그래서 그녀가 자유 수영 수강권 등록하고 수영 강습 어쩐지 부끄러워 애써 피했었다는 첫 번째 글 매우 공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유머가 있는 책은 아니지만, 수영을 너무나 좋아하고 수영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다른 이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동안 묘한 자극을 받았다. 나에게 '수영'과 같은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서, 어쩌면 코로나만 사라지면 접영을 다시 배워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면서. 그리고 그녀처럼 성실한 사람도 매일 수영장에 갈까 가지말까의 고민을 하며 괴로워한다는 사실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수영은 혼자 하는 운동이지만, 수영장에서는 완전히 혼자일 수 없다. 수영장에서 마주친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를 읽는 동안에는 그녀가 얼마나 수영 그 자체를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것을 잘하려고 애쓰기만 하다가 즐기지 못하는 상황을 얼마나 경계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상태로 두기 위해 '오늘은 그냥 놀 거에요.' 말하는 부분은 흐뭇하다. 수영은 힘이 필요한 운동이지만 힘을 빼야 잘할 수 있다는 역설은 작가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이며, 내가 지향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찰랑거리는 파란 수영장 물에서 반짝, 빛이 난다.





  <대파와 물안경>은 '3개월차 신혼 에세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지만 신혼의 삶 자체라기보다는 결혼한 이후의 먹고 사는 일상의 기록이 대부분이다. 남편과의 취향 조율도 가구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먹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남은 식재료를 제때 처리해야 하는 번거로움, 태풍과 장마로 토마토 가격이 올라 좋아하는 완숙 토마토 소스를 만들지 못하고 토마토 파스타 소스를 사와야 했던 아쉬움, 크리스마스 특식으로 남편과 먹을 돼지갈비찜을 하면서 떠올린 싱글 시절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 등 주로 먹는 것으로부터 떠올린 기억과 감정의 기록들이다. 눈이 매워 물안경을 끼고 대파를 썬다는 대목에서, 코로나 때문에 수영을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가 고작 대파를 썰 때 물안경을 껴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면서 웃겼다. 한편으로는 이제 수영장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수영하듯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신혼 에세이'에 남편 얘기보다 그녀 자신의 얘기가 더 많아서 신선하면서도, 파도처럼 변화무쌍한 인생의 순간마다 여유롭게 수영하듯 물살을 즐기면서도 힘 있게 나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두 권의 책에 일관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코로나가 사라지면 제일 먼저 새 수영복을 사고 수영모와 물안경도 사서 접영을 배우고 싶다.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서 서핑도 하고 바다 수영으로 멋지게 파도도 넘어보고 싶다. 하나우마 베이에서는 느릿느릿 떠다니며 스노쿨링도 해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짙은 초록색과 나무 향기가 배어나오는 여름 소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