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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승 Oct 25. 2018

톰슨 가젤 계나야, 나는 널 응원해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Joice's story에 저장해두었던 글입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로 시작해서, '나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으니,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식으로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향한 '위로'와 '힐링'의 메시지가 서점을 들었다 놨다 했었다. '나도 젊을 땐 힘들었어, 방황은 청춘의 특권이지', '고통과 팍팍한 현실을 여유있게 즐기다보면 성장할 수 있어' 따위의 어설픈 위로나 식상한 자기계발서에 지쳐있을 때쯤,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가 눈에 띄었다. 생존 경쟁을 위해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면서도, 원래 힘겨운 게 청춘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긍정적으로 버텨보라는 더 답답한 위로를 들으며 현실에 찌들어가고 있는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계나'는 과감히 작별을 고한다, 호주로.


  이제는 식상하다고 여겨 질 우리 사회의 공식이 있다. 한국에서 성공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데, 세 가지 조건이란 곧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을 말한다. 3대를 거쳐도 흔들리지 않는 '할아버지'의 탄탄한 재력, 공교육과 사교육 바닥을 바쁘게 오가며 쌓은 고급 인맥으로 최신 입시 정보를 모아다 줄 엄마의 치맛자락, 묵묵히 가장으로서의 자리를 지키고 '모르는데 아는 척' 안 하는 아빠가 있어야 좋은 대학에 무난히 들어가 평생 따라다닐 빛나는 꼬리표를 얻어낼 수 있다는 웃지 못할 농담. 계나가 못 견뎌 하는 한국의 현실을 압축해 놓은 농담인지도 모르겠다.


  지구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즉, 60억 인구가 각각 60억 개의 서로 다른 soul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보니 같은 국경 안에 태어나 자랐다는 이유로, 서로 완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통일된 삶의 방식을 강요할 수는 없다. 동시에, 다수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난할 이유도 없다. 자발적 순종에 따라오는 타인의 '인정'을 먹고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도 존중받아 마땅한 거니까. 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삶의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있는 사람의 삶도, 주변부에 있는 사람의 삶도 모두가 가치있음을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가 우리가 꿈꾸는 사회가 아닐까. '한국이 싫어서'에서는 '한국적 성공'을 향한 무한경쟁의 공식에서 밀려난 20대 후반 '계나'의 선택을 '계나' 스스로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떠나는 이유를 계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프리카 초원 다큐멘터리에 맨날 나와서 사자한테 잡아 먹히는 동물 있잖아, 톰슨 가젤. 걔네들 보면 사자가 올 때 꼭 이상한 데서 뛰다가 잡히는 애 하나씩 있다? 내가 걔 같애. 남들 하는 대로 하지 않고 여기는 그늘이 졌네. 저기는 풀이 질기네 어쩌네 하면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다가 표적이 되는 거지. / 하지만 내가 그런 가젤이라고 해서 사자가 오는데 가만히 서 있을 순 없잖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은 쳐 봐야지. 그래서 내가 한국을 뜨게 된 거야. /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게 멋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그래서, 뭐 어떻게 해? 다른 동료 톰슨가젤들이랑 연대해서 사자랑 맞짱이라도 떠? (11쪽~12쪽)   


그리고 이런 계나의 질문에 허희 문학평론가님은 작품 해설에서 이런 답을 달았다. "톰슨 가젤들이랑 사자랑 맞짱뜨자는 게 아니야. 톰슨가젤들이랑 사자랑 연대해서 우리를 부숴버리자는 거지."(202쪽)


  계나의 이야기를 다 읽고 그냥 자연스럽게 들었던 나의 생각을 작품 속 계나의 화법을 빌려 솔직하게 옮기면, 그게 곧 서평이 될 것 같다. (한국에서 같은 이십대 후반의 나이를 지내 온 여자사람친구로서. 계나 친구 미연이나 은혜까진 아니어도 그 비슷한 어디쯤에 위치한 또 한 명의 친구로서.)


그래, 계나야. 맞짱을 뜰 줄 알거나 우리를 부숴버릴 수 있는 깡이 있으면, 그건 애초에 톰슨 가젤이 아니었던 거야. 사자도 사자답게, 톰슨 가젤도 톰슨 가젤답게 살아갈 권리가 있지. 다른 가젤들과 연대해서 우리를 부숴버리자는 친구들은 또 그 친구들대로 치열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고. 강자의 표적이 될까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있다면 참 좋겠지만, 사자와 톰슨 가젤이 서로 손잡고 초원을 뛰놀 수 있는 낙원이 있다면 너무나 좋겠지만, 그런 세상은 비현실적이라는 걸 뼈아프게 깨달아 버린 이십대 후반의 톰슨 가젤은 어떤 삶을 사는 게 옳은 걸까? 아프리카 초원이든, 한국이든, 호주든 어디에나 사자는 있고, 시도때도 없이 표적을 찾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가장 용기있는 톰슨 가젤이라고 생각해. 사실 표적이 되어가면서도 움직일 생각안하고 스스로가 톰슨 가젤임을 한탄하면서 불안하게 사는, 그런 가젤들도 많잖아. 계나 너는 지명이라는 친구가 너에게 든든한 우리가 되어 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우리 안에서 사자는 피할지언정 '그늘이 졌네, 풀이 질기네, 답답하네' 정도의 불평을 할 정체성마저 상실한 개체가 되고 싶진 않아서 그 든든한 우리를 스스로 거절한 용기 있는 톰슨 가젤이란 거지. 안주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은 거야. 호주에 있다가 새롭게 알게 된 호주 사자에 실망해서 다시 또 어떤 나라로 이동한다고 해도 그건 '도피'가 아니라 명백한 거부권 행사이면서 동시에 톰슨 가젤의 정체성 찾기일테니, 나는 너를 응원해. 그리고 언젠가 너의 선택이 다른 톰슨 가젤들에게 용기를 주어, 표적이 될 톰슨 가젤들이 저마다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매일 매일 표적을 찾아 살쪄가는 사자의 배를 굶주리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톰슨 가젤식 저항인 셈이지. 너를 만나서 반가웠어. 요즘은 사자들이 영리해져서 말이야, 톰슨 가젤들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순하게 우리 안에서 불평 불만하는 것을 톰슨 가젤의 로망으로 받아들이라고 보기 좋게 포장한 말들로 유혹을 하더라니까. '아프니까 톰슨 가젤이다' 뭐 그런 식으로 말이야. 그리고 심지어 톰슨 가젤들이 그런 자애로워보이는 사자에게 하트표를 날리다가 잡아먹히기도 하는 무서운 세상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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