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혁 <초급 한국어>, <중급 한국어>
코로나 팬데믹은 지구상의 온 인류로 하여금 '안온한 일상'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얼마나 절실해질 수 있는지 충격적으로 깨닫게 했다. 하루에도 몇 번 씩 무심코 상대방의 안녕을 묻던 우리에게도 인사말 뒤의 물음표가 제 역할을 한 적은 거의 없었으므로 충격의 크기는 같을 수밖에 없었다.
소설은 이런 변화를 경험한 이들을 향하여 사람과 삶에 대하여,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피할 수 없는 위기와 크고 작은 슬픔과 좌절과 무력감에 대하여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전에도 대부분의 소설은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일상과 비일상의 세계를 오가며 온갖 신체적, 정신적 고초를 겪으면서 삶에 대한 여러가지 질문을 던지곤 했지만, 같은 변화를 경험한 동시대 작가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이게 되는 건 언제고 또 무엇에게 나의 일상을 다시 빼앗길 수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아직 가시지 않은 탓일까. 그건 어쩌면 한 번 자각했으니 다시 사라지지 않을 불안감일지도 모르겠다.
<초급 한국어>(이하 <초급>)는 뉴욕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는 서술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모국어를 외국어로서 낯설게 바라보게 한다. 태어나 청각이 발달하면서부터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던 모국어가 생각의 프레임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나 자신에 대하여, 꿈과 목표에 대하여, 가족과 친구 관계에 대한 성찰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안녕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가세요. 우리는 왜 이토록 서로의 안녕에 집착하는 걸까. 어쩌면 그건 '안녕'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39쪽)
잘 지내냐는 말은 무력하다. 정말로 잘 지내는 사람에게도, 실은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도.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에 '잘 지낸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오히려 나의 진짜 '잘 지냄'에 관해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가깝다...(중략)...나는 아무도 진심으로 묻지 않는, 아무에게도 진심으로 대답하지 않는 나의 안부에 관해 잠시 생각했다.(73~74쪽)
<초급>은 뉴욕에서 정착하여 작가가 되려던 서술자의 꿈이 좌절되고 한국으로 돌아오며 끝난다. <초급>은 '나는 안녕한가요? 어떻게 사는 게 안녕하게 사는 건가요? 당신은 어떤 안녕에 절실한가요?'를 외치는 소설이다. 고독한 방랑자의 한숨과 자조 섞인 목소리는 내 것인 것처럼 익숙해서 아프다. <초급> 완독을 '견뎌야' 하는 이유는 마지막장까지 가시지 않는 씁쓸함 때문이리라.
<중급 한국어>(이하 <중급>)의 서술자는 한국으로 돌아와 결혼도 했고, 몇 번의 거듭된 실패 끝에 어렵게 가진 딸도 있다. 현실 감각이 없다는 비난을 감내하면서도 글쓰기 강사로 벌이를 해가며 여전히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쥐고 있다. <중급>이 <초급>보다 훨씬 술술 읽히는 것은 아마도 대부분의 우리와 현실적으로 닿아있는 지점이 많아서일까. 스펙터클한 사건이 펼쳐지는 것도 아니고 <초급>처럼 배경이 외국도 아니지만, 그가 스스로 유년 시절의 기억을 더듬고 글쓰기 수업에서 인용할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을 떠올리며 <초급>에서 던져놓았던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지극히 평범한 그의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결혼과 부모됨은 인생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할 만큼 격변(?)이 아닐 수 없는데도 멀리서보면 그저 인류가 되풀이해온 통과의례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를 떠올리며 그가 일기쓰듯 풀어내는 내면의 변화에 귀 기울이게 된다. 그는 특출난 것 없이 어디서나 애매하다는 말을 듣는 게 억울하지만 흩어져 있는 기억 속의 유의미한 점들을 성실하게 찾아내 반듯하게 선을 그려나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때의 나는 몰랐지만 지금의 나는 알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통찰, 깨달음, 더 나아가서는 내 과거에 대한 해석과 논평일 겁니다. 커넥팅 더 닷츠. 인생이란 점을 선으로 잇는 과정이라고 하잖아요?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은 그런 겁니다. 점과 점을 잇는 것. 선을 그리는 것. 그 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내는 것. ......여러분의 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요? (62쪽)
인간의 기억은 결코 영화나 드라마처럼 깔끔하게 편집되어 있지 않다. 기억은 구불구불한 오솔길이며, 인적 없는 낯선 도로이고, 오직 손과 발을 사용해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자에게만 다음 길을 보여 주는 어둠 속 미로다. 기억은 재생이 아니라 창조이며, 따라서 우리의 과거는 허구 위에 지은 집이다. 우리는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발명한다. (64쪽)
자기 수양하듯 선을 그리며 그는 남편으로서, 아빠로서의 자아가 부여하는 책임감을 받아들인다. 책임감은 책임져야 할 것들의 우선순위를 위해 이제껏 붙잡고 있던 어떤 것을 놓아야 하기도 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부족함을 새롭게 발견하거나, 자기 안의 숨겨둔 모순을 있는 그대로 껴앉게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타인의 안녕 묻기에도 소홀히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며, 그가 받아들인 책임감이 가족을 위한 이기적인 책임감에 그치지는 않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 내면의 흐름이 읽는 이의 마음을 계속 두드린다.
되풀이하는 것만이 살아 있다. / 되풀이만이 사랑할 만하다. / 되풀이만이 삶이다.(162쪽)
무언가를 반복하는 행위는 그 행위 자체, 또는 그 행위를 통해 닿는 대상이 깊은 애착의 대상일 경우에 가능하다. 애착의 대상이 있으면 삶의 의지가 생기고, 반대로 애착의 대상이 있다는 것은 생의 의지가 있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무엇이 먼저든 삶의 의지와 애착의 대상이 있다면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
그가 글쓰기 강의 후반부에 다루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단순히 소설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소설 바깥에 존재하'(223쪽)는 '진짜 삶'(223쪽)에 관한 '완벽한 메타포'(219쪽)다. 아이의 생일을 기념해 케이크를 예약 주문하였으나 생일 당일에 불의의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가 다시 빵집에 들른다. 부부의 노쇼에 대한 언쟁이 몇 번 오가다가 진실을 알게 된 빵집 주인이 달콤한 빵으로 부부를 위로하다가 이내 메뉴에도 없는 검은 빵을 꺼내와 함께 뜯어먹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날이 새도록 나눈다. 존재의 가치를 상실한 상한 케이크, 순간의 달콤한 맛으로 위로의 마음을 전달한 롤빵, 뜯어먹기 힘들지만 먹다 보면 풍부한 맛이 느껴지는 검은 빵. 그는 강의에서 잠깐의 허기를 달래주는 롤빵만으로는 하루하루를 버텨낼 수 없음을 말하며 검은 빵을 뜯어먹으며 함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마지막 장면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바로 거기에 검은 덩어리가 있습니다. / '뜯어 먹기 힘들지만, 맛은 풍부한' 인생 그 자체를 발견하게 되는 거죠. 이 단계에서는 기쁨도 슬픔도 행운도 불운도 쾌락도 고통도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니까 '좋다, 싫다'가 아니라 '풍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냥 사는 것입니다. 일어난 일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220쪽)
그의 이야기로 빵의 비유를 풀어보자면 상한 케이크는 그가 뉴욕에 정착해 작가가 되어보겠다고 발버둥치던 시절, 위로를 주는 달콤한 롤빵은 그의 가족인 은혜와 은채, 그리고 엉겁결에 출판하게 된 첫 책에 해당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에게 검은 덩어리란 아마도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지닌 현실적인 책임감과 작가로서의 채워지지 않은 갈증이 뭉쳐진 어떤 것이리라. 그는 기꺼이 그 덩어리를 뜯어먹기로 결심한다. <중급>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안녕하게 사는 건가요?'하고 외치며 변두리를 방황하던 <초급>의 젊은이가 '내가 바라는 안녕은 이런 겁니다.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지키며 앞으로도 그저 나답게 나의 안녕을 지켜보려 합니다. '로 가는 여정이다. <중급>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독자는 독자 자신의 안녕에 대하여 묻고, 스스로 정한 방향으로 새로운 여정을 떠난다.
<중급>은 나에게 2024년 올해의 책이 되었다. 2024년은 나에게도 두 돌 지난 아이를 처음으로 기관에 적응시키고 육아에 지친 몸과 마음 상태를 정비하며 복직 준비를 하는 한 해였으므로, <초급>과 <중급>은 글 쓰는 자아와 가르치는 자아, 엄마 자아와 아내 자아를 균형적으로 정돈시키고 워킹맘으로서 스스로에게 새로운 안녕을 다짐하는 데 친근한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덧1) <초급>과 <중급>을 읽고 나면 두 책의 표지 디자인이 묘하게 다시 보인다. <초급>의 표지에는 초원 위에 있지만 애처로운 다리만 내어놓고 온 몸에 담요를 뒤집어 쓴 채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이 보인다. 드문드문 모래 사막처럼 보이는 공간이 보이므로 일단 초원 위에 서 있기로 한다. 그는 아마도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누구나 선망하는 화려한 뉴욕의 거리를 오가며 한국어 강의를 하고 있지만 도무지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방황하는 문지혁의 모습이 아닐까. <중급>의 표지에서는 드넓게 펼쳐진 사막 위에 반소매, 반바지를 입은 한 남자가 뜨거워보이는 모래 위를 맨발로 한 걸음 딛고 나아간다. <초급>의 표지에서와는 다르게 산도, 새도 보이고 노란 아기 오리도 보이는 가운데 싱그러운 잔디밭도 작게나마 보인다. 더 이상 담요를 덮고 있지 않다는 것, 뜨거운 날씨에 맞서 반소매와 반바지를 입고 뜨거운 모래 바닥을 밟고 앞을 살피며 나아가려는 발걸음을 떼는 이 남자는 또한 문지혁이겠지만 <초급>의 그와는 사뭇 다르다. 표지 그림을 그린 김보민 작가의 의도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작품을 읽고 표지를 다시 보는 재미를 선사해준 것에 감사한다.
덧2) 사적인 서점 정지혜 사장님이 <초급>을 읽고 있다는 나에게 부디 포기하지 말고 꼭 완독하신 후 <중급>을 읽으라고 조언하신 이유를 알았고 또한 매우 감사했다. 누군가에게 나도 꼭 같은 말로 추천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