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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Feb 20. 2019

보석이의 그루브를 위하여

임신과 사색_ 2

입덧이 사그라지고 있다. 지난주에 겪었던 구토와 심한 목 통증은 알고 보니 감기 증상이었다. 일주일쯤 지난 지금은 밭은기침과 콧물로 고생 중이지만 헛구역질이나 음식 기피는 좀 덜하다.


밤새 콜록 대니 남편은 안절부절 하지만 나는 안심이 됐다. 열 같은 전신증상도 없는 목감기야 아무리 괴로워도 일주일이 지나면 어쨌든 낫는다.


임신 초기가 지났으니 아기에게 큰 영향도 없을 듯하고, 끝이 있는 괴로움은 한결 덜 한 법이다.


이 기침만 끝나면 좀 사람답게 생활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아기는 오늘로 정확히 13주가 되었다.


오늘은 정밀초음파를 하는 날이었다. 기형아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정밀 초음파로 목덜미 두께를 재는 것인데, 모든 임산부가 겪는 과정이겠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여러 근심과 걱정이 떠오른다. 다운증후군이라면, 척추관 기형이나 다른 생각도 못한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야 막을 수 없으나 호들갑을 떨며 지나친 걱정이나 근심을 키울 필요는 없다. 흘러가는 생각으로 그냥 두면 되는 것이다.      


임신을 하면서 급격히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이, 아니 넓게 보면 산다는 것이 참 재미있다.


임신이 왜 되지 않나 초조해하다가, 임신이 되니 초기에 유산이 될까 노심초사하고, 초기를 잘 넘기고 나니 기형이나 질병을 두려워한다.


하루는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염려를 하나 맘 카페를 검색해보니 누군가 어렵게 가진 임신이라 기쁘지만 입덧 때문에 죽겠다고 호소해놓았다. 거기에 누군가의 댓글이 인상적이었다.


‘쉽게 임신되고 입덧 하나 없이 순조롭게 낳았지만, 독박 육아하느라 미치겠네요.’


최근 군 생활 중이던 지인의 조카는 높은 곳에서 작업을 하다 떨어져 중태에 빠졌다. 일가친척 중의 첫아들로 온 사랑을 독차지하던 20살 청년이었다고 한다.


내가 이런 지난한 임신 과정을 거쳐 독박 육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의젓한 20살 성인으로 키운 아들이 군대에 가서 이렇게 생을 마감한다는 통보를 들으면 얼마나 끔찍할까.


어려운 과정을 지나면 수월한 순간이 오기도 하고, 거저다 싶게 쉬운 관문을 지나면 혹독한 다음 순서가 올 수도 있다. 꼭 강약 순서로 오는 것도 아니다. 강강약강, 약약약강 뭐 그런 식일 수도 있다. 


그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내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미래의 근심을 소환하자면 끝이 없다.      




남편은 시간이 안 되고, 시어머니가 병원에 같이 가겠다고 하였으나 만류하였다. 아직은 운전할 만하니 더 힘들어지면 도와달라고 완곡히 말씀드렸다.


아무래도 혼자가 편할뿐더러 이번에는 정밀초음파 날로, 나쁜 소식을 들을 가능성도 없지 않은 날이다. 병원에 가면 나쁜 소식을 들을 있다는 강렬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기 때문인지 혼자 병원 가는 것이 전혀 섭섭하지 않다.


다만 초음파에서 보이는 아기의 움직임을 나 혼자 본다는 것이 참 아깝다. 남편은 동영상을 찍을 수는 없는 거냐며 뱃속의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정밀초음파를 보는 방 앞에는 역시나 산모와 남편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내 배는 명함도 못 내밀 크기지만 ‘나도 산모다’라는 얼굴로 초음파 방에 들어갔다.


정밀초음파를 보는 곳이라 평소와 다른 진료실이었다. 검사할 준비가 되자 의사가 커튼을 열고 들어온다. 해상도가 높은 초음파로 아기 몸의 구석구석을 확인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곰돌이처럼 둥글둥글하기만 한 2주 전 체형과는 많이 다르다. 구부리고 있는 무릎관절이 꽤나 정교해 보였고, 쭉 펼친 다섯 개 손가락도 선명하다. 녀석은 자궁벽에 등을 기대고 꽤나 편안한 듯 둥실 거리다가, 갑자기 우리를 향해 돌아눕기도 했다.


초음파를 조작하자 아기의 모양이 입체로 구성되었다. 이목구비가 제법 보인다. 태아 사진을 보고 잘 생겼네 마네 하는 엄마들의 이야기에 코웃음을 쳤었지만 오늘 보니 내 아기는 진심으로, 잘 생겼다고 생각했다. 자세한 이목구비는 알 수 없지만 위치한 각 자리의 비율이 훌륭하다.



나는 혼자 조용히 ‘엄마 미소’를 지었다. 발달도 좋고, 목덜미 두께도 정상이다. 확인 가능한 기관들은 모두 정상 소견이다. 눈물이 나려는 걸 보니 내가 은근히 걱정을 많이 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를 향해 돌아눕던 아이를 생각하니, 이제 정말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은 ‘태교를 해야 한다니까’ 의무감에, 나의 안정을 위해 음악을 들었는데 지금은 노트북을 켜서 글을 쓰려다 말고 ‘아 참, 보석이가 심심하겠구나!’라는 생각에 미쳐 음악을 튼다. 아직은 청각이 발달하지 못했겠지만 어쩐지 음악이 있으면 보석이가 그루브를 타며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긴 여정이 남아있지만 함께 즐겨보자, 보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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