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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Feb 23. 2019

모지스 할머니의 하루처럼

임신과 사색_ 3  <모지스 할머니, 평범한 삶의 행복을 그리다>를 읽고

매일매일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살아가던 중 임신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하지만 크고 작은 불편감과 건강의 이상 징후가 나타나면서 나와 아이를 위해,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갑자기 주어진 너무나 많은 시간. 

쉬어서 좋다는 생각은 잠시, 분초를 다투며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나 혼자 멈춰 서서 세월을 허비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몰려온다. 아이는 누구나 낳는 것인데 아이를 낳는 모든 여성이 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일과 삶을 뒤로하고 임신이라는 상황에 매진해야 하는 게 새삼 당황스럽게 느껴진다. 


맞벌이 부부로 지낼 때는 보이지도 않던 세세한 집안일,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는 일 등은 열심히 해도 티도 안 나는 일이다. 거칠거칠한 마음으로, 임신한 전업주부가 된 지 딱 일주일 만이었다. 모지스 할머니의 이야기를 만난 것은.     



평범한 농장 아낙네로 집안일을 하며 살아온 모지스 할머니는 75세 때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연히 발견된 그녀의 그림은 국민적인 인정과 인기를 얻었다. 그녀는 미술을 정식으로 공부하지는 않은 ‘프리미티브 예술가’지만 그녀의 작품은 120만 달러에 팔리기도 했으며, 많은 엽서와 우표의 그림으로 미국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10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1600점의 그림을 남겼다고 한다.      


그녀는 오랫동안 이러한 성공을 꿈꾸다가 마침내 이룬 것이 아니다. 평생의 대부분을 집안일과 농장일에 집중하며 살았다. 어린 시절에서는 열 남매 중 셋째 딸로서 집안일을 도왔고, 십 대가 되어서는 부유한 이웃의 가정부로 일했으며, 결혼하고서는 소작농인 남편을 도와 살림을 했다. 그녀 역시 열 남매를 낳았고, 그중 다섯이 유아기 때 세상을 떠나버린 슬픔을 겪었다. 


그래도 그녀의 일상은 꾸준했다. 식사를 준비하고 빨래를 하고, 비누와 양초를 만들고, 자신의 만든 잼을 장에 팔았다. 조용한 저녁 시간에는 자수를 하고 퀼트를 하며 마음을 다스리며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러다 관절염으로 더 이상 자수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어린 시절 관심이 있었던 그림을 시작했을 뿐이다. 


빨래를 하거나 잼을 만드는 것, 자수를 하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 중 무엇에 차별을 두거나 편애하는 일은 없었다. 그 일들은 모두 담담하고 성실한 그녀의 하루를 완성하는 방법이었을 뿐이다. 


뒤늦게 그림을 시작한 그녀가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 인정받고 ‘국민 할머니’가 된 것은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인정받고 사랑받지 않았다고 해도 모지스 할머니의 일상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지스 할머니는 자신의 삶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 종일 집에, 집안일에 갇혀 있다고 투덜대던 나에게 모지스 할머니의 잔잔한 그림들이 제각각 말을 걸어온다. 





창 밖의 후식 밸리 Hoosick Vally (From the Window) 1946

<창밖의 후식 밸리> 창문 넘어 먼 산을 보듯, 심호흡 한 번 깊게 쉬고 멀리 보라 말해주고 있다. 세세히 보는 즐거움과 함께, 전체를 보는 넉넉함을 가지라고 말한다.     




마지막 짐 The Last Load 1947

<마지막 짐> 원근법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 오늘도, 멀리 있는 과거와 미래도 모두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사실 ‘미래를 위해 오늘을 팔지 말라’며 ‘지금, 여기’를 강조하는 현대의 수많은 문구도 독촉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모지스 할머니는 강요하지 않고 자신의 그림과 삶으로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결정되지 않은 미래가 모두 중요하다고. 꽉 찬 그녀 그림의 가깝고 먼 여러 집들처럼.     




오늘은 휴교 No School Today 1947

<오늘은 휴교> 아름다운 설경에 압도된다. 썰매 타는 아이들과 달리는 말의 콧김도 설경에 포함된다. 오늘은 휴교! 얼마나 설레는 말인가.     




컨트리 웨딩 A Coundry Wedding

<컨트리 웨딩> 결혼을 주제로 한 그림이나 사진에 여러 명의 신랑 신부가 나오는 건 흔치 않을 것이다.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은 대체로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이고, 비중의 격차가 없다. 그들의 합이 전체를 이루지만 각 주인공들은 전체를 위해 강요당하지 않는다. 퀼팅이나 털실 그림처럼 한 땀 한 땀이 제각각 살아있다.     





첫 자동차 First Auto 1969

<첫 자동차> 역시 그녀만이 주인공이 아니다. 차에 탄 네 사람 모두 동일한 기쁨을 만면에 띄우고 있다.      




빨래하는 날 Wash day 1945

<비누 만들기, 양 목욕시키기> <양초 만드는 날> <빨래하는 날> 다른 것은 해본 적 없지만, 빨래를 해본 경험은 있다. 빨래를 하며 모양 대로, 크기 대로, 종류 대로 반듯반듯 놓기 위해 골몰하는 경험은 빨래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것이다. 할머니는 머릿속에서 부지런히 빨래를 모양 대로 널었을 것이며, 그림에도 빨래가 실제 결려있는 모습이 아닌 종이인형 옷 입히기에 나오는 종이옷처럼 반듯반듯하게 그려 넣었다.   




퀼팅 모임 The Quilting Bee 1950

<퀼팅 모임> 이 그림 또한 모지스 할머니의 마을에서 실제로 있었던 장면일 것이다. 모지스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헤아려가며 모임의 한 순간을 새겨 넣듯이 그림 그리지 않았을까? 여러 자투리 천을 모아 잇대었을 때 드러난 퀼트 무늬처럼, 소박하고 성실한 이 마을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만들어내는 하모니에 대한 애정을 담아 그렸으리라.






마더 테레사는 '아주 하찮은 일을 커다란 사랑을 가지고 하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찮은 마음을 가지고 대하면 그 일은 계속 하찮은 일이 된다. 하지만 커다란 사랑을 가지고 즐겁게 일하는 모지스 할머니에게 그 누구도 당신의 일상이 하찮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모지스 할머니의 마을 사람들과 한 데 어울려 비누와 양초를 만들고, 양을 목욕시키며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어 씨익 웃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모지스 할머니와 동네 아낙들은 기꺼이 거칠거칠해진 내 마음에 알록달록한 자투리 천 조각을 예쁘게 덧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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