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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Feb 25. 2019

주부 초단의 부엌 길들이기

임신과 사색_ 4

배가 살살 아파서 이른 아침에 깨어났다. 요즘 자궁이 커지면서 바로 눕는 것이 힘들어 긴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지만 오늘 배 아픈 느낌은 또 다른 종류의 것이다. 아픈 부위는 배 이쪽저쪽으로 돌아다니더니, 춥고 기운이 없는 전신증상까지 동반되었다. 


오전에 약속되어있던 모임에서 병든 닭처럼 졸다가 집으로 돌아와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임신을 하고 크고 작은 많은 신체변화가 오고 가지만, 오늘 이건 뭘까.    


3시간을 자고 일어나니 좀 기운이 나서 저녁을 간단히 차려 먹었다. 800L가 넘는 냉장고에는 먹을 것이, 아니 먹어야 할 것이 차고 넘친다. 3주 전에 해 놓은 콩자반은 젓가락도 대지 않고 넣어놨는데 이제 시큼한 냄새를 풍긴다. 추석 때 친정에서 싸준 돼지갈비찜은 까맣게 잊혀 냉장실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다. 당장 먹지 않으면 냉동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조금 남아있는 식혜도 다 따라 마시고 빈 통을 설거지 더미에 던진다. 


그런데 설거지를 하다 보니 식혜를 담았던 통 뚜껑에 곰팡이 같은 거무죽죽한 자국이 보인다. 혹시 어제 마신 식혜 때문에 오늘 몸이 안 좋은 걸까.     


주방은 거대한 생태계와 같다. 사다 놓은 재료는 각 식자재 특성에 따른 일정 기간 내에 요리로 만들어져야 한다. 요리된 음식이라고 방심할 수는 없다. 단기 저장만 가능한 음식부터 식탁에 내어놓아 냉장고 순환율을 높여야 한다. 향후 집에서 식사를 몇 끼나 할지 계산하여 장기 보관이 필요할 음식 같으면 냉동실로 속히 이동시켜야 한다. 


냉동은 몇몇 음식들에 영생(?)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는 훌륭한 장소지만, 아무래도 맛이 반감되고 자꾸 이것저것 넣다 보면 나중에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잊어버린는다는 단점이 있다. 각 식재료와 조리 음식들은 고유의 유효 기간을 갖고 있어 섬세히 관리해주지 않으면 수명을 다하고 상해버린다. 오늘 내 뱃속에 들어와 나의 무심함을 비웃고 있는 곰팡이 균처럼.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와 살림이 커지니 전보다 더 많은 기억력과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냉장고뿐 아니다. 빨래는 어떻게 분리하여 얼마나 자주 돌릴지, 각 방에 쌓인 먼지는 얼마나 자주 털어주어야 할지, 전기와 가스비는 어떻게 나올지 아직은 혼란스럽다. 다른 스케줄 없이 주부의 일만 해도 하루는 금방 지날 듯하다. 몇 년 전만 해도 주부의 일은 ‘누군가 해야 하지만 내가 하고 싶지는 않은 일’로 생각해왔던 나인데 말이다.      


30여 년을 주부로 살아오신 시어머니는 ‘여자들은 주방이 맘대로 안 되면 마음이 불편해.’, ‘여자들은 장롱이 있어야 돼.’ ‘여자들은 집이 정리가 되어야 마음이 놓이는 그런 게 있어’라며 당신이 생각하는 ‘여자’로서의 감각을을 내게도 심어주시곤 한다. 


‘여자들은...’하는 이런 레퍼토리가 불편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시어머니는 주부로서 프로페셔널이다. 냉장고 4개에 꽉 찬 먹거리를 관리하며 늘 신선한 요리를 내놓고, 세탁기도 하루 이상 돌리지만 전혀 바빠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주방을 베이스로 삼아 집안 전체를 활기차고 생기있게 만든다. 


주부로서의 전문성은 누군가 집안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알아줄 일이 없겠지만, 그녀가 먹이고 입혀온 세 남자가 가정에서 안정과 평온을 느끼며 자신감 있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될 거라 생각한다.


내일은 시어머니께서 임부복을 사주신다고 함께 쇼핑을 가자고 하신다. 나도, 우리 엄마도 미처 신경 쓰지 않는 일을 그녀는 기꺼이 자기 활동영역으로 편입시킨다. 결혼 초반에는 이에 저항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내가 그녀의 관리 영역에 귀속되어 있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녀의 4개의 냉장고가 이제 나까지 포함된 4명의 인생을 먹이고 입히는 생명의 원천임을 존중하려 한다.      


나는 우선 800L짜리 냉장고 1개를 감당하고 내 한 몸 건강을 잘 관리하는 것부터 목표 삼아야겠다. 밤이 되니 그래도 기운이 좀 난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도 좀 읽어야 하는데 벌써 밤 9시가 넘었다니.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로 괜히 바쁜 임산부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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