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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Feb 10. 2019

그저 조금 힘든 하루

임신과 사색 _ 1

어제 먹고 그냥 뒀던 두유 팩을 치우려고 싱크대 앞에 섰다가, 상한 두유의 시큼한 냄새 분자가 감지되자마자 “우욱”하고 구역질이 올라왔다.


평소에도 헛구역질이 있었지만 완전히 방심하고 있다가 냄새를 맡아서인지 이번에는 참을 수 없는 사출성 구토가 뿜어져 나왔다. 3시간 전 간단한 점심이라고 먹었던 고구마 2개가 위액에 뒤섞여 변기를 채웠다. 아침에 먹은 갈비탕의 잔해까지 나온 것 같다.


입과 식도를 통해 위로 들어갔던 음식이 방향을 역행하여 들어갈 때보다도 빠르게 올라오는 느낌이, 아주 더럽다. 다 올라오지도 못하고 식도 벽에 붙어 있는 밥 알갱이들이 구토를 계속 유발한다. 뱉을 대로 다 뱉어 봐도 여전히 무언가 남아있는 듯 칼칼한 목이 불쾌하다.


역겨운 내 토사물들을 빠르게 변기로 흘려버리며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지 헤아려본다. 퍽퍽한 고구마를 2개나 먹은 것? 먹고 활동했어야 하는데 앉다가 눕다가 했던 것? 두유 팩을 바로 치우지 않은 것? 전 같으면 내 소화력에 조금의 영향도 주지 못했을 사유들이다.      


‘12주의 기적’이라고 해서 12주 무렵에 입덧이 기적적으로 멈추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12주 차가 되는 날, 전에 없었던 심한 구토를 하고 패잔병처럼 누워있다. 부엌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 두렵다. 내가 만든 음식을 쳐다보기만 해도 그 냄새가 느껴져 위의 압력이 올라가려 한다. 복숭아나 고구마 껍질 같은 음식쓰레기들을 비닐봉지에 간신히 숨겨 놓고 남편이 구조해 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다른 사람에 비하면 입덧이 심한 편도 아니라는데, 하루하루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잘 안 되어 더부룩하고, 소화가 좀 되려 하면 무섭게 구역질이 나니 하루 종일 어떻게 무사히 음식을 먹을 수 있나 하는 생각에 온 신경이 가 있다. 뱃속의 태아에게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려면 평소보다도 잘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더욱 스트레스를 받는다. 먹는 것이 이렇게 고문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그래도 이 구역감은 내 안의 생명을 자라게 하는 호르몬이 끊기지 않고 일하고 있다는 증거이므로 마냥 괴롭기만 하진 않다. 그저 조금, 힘들 뿐이다.     




애 둘을 키우는 친구와 대화를 했다. 벌써 둘을 무사히 출산한 친구가 부럽다고 말해주었다. 최근에 막 둘째를 낳은 친구는 출산보다 육아가 훨씬 힘들다고 말한다. 애 둘을 키우는 고충이 얼마나 크겠냐마는 내 눈에는 이미 지나간 것, 이룬 것들이 더 많이 보여 여전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원하던 임신이 되어 큰 기쁨을 누렸지만 10개월의 다난한 과정을 우회 없이 지나야 한다.


입덧은 시작일 뿐이다. 출산에 성공하기 까지 뱃속의 연약한 생명의 안위에 대한 미확정성의 두려움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10개월을 무사히 통과하고 그 생명과 대면하면 비로소 모든 두려움이 종식되는 커다란 안도와 기쁨이 찾아오겠지. 하지만 그 기쁨에 수반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하는 육아라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질 것이다.


그때도 나는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한 불편과 고통은 기꺼이 감내할만한 큰 행복이 올 테니까. 그저 조금, 힘들 수는 있다. 지금처럼 조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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