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이가 생후 6개월이 다 되어가는데도 나는 이유식 만들기를 피할 구실을 간절히 찾고 있었다. 결혼 살림을 시작한 지 2년 째지만 레시피 없이는 김치찌개도 만들지 못하는 나다. 맛이나 분량을 조절하는 '감'이라는 게 없어 무조건 2인분만 만든다. 그런 내가 온종일 아기를 돌보며 이유식 재료를 준비하고 요리까지 해내는 건 불가능이라 느껴졌다. '아마추어 엄마의 어설픈 요리보다 시판, 배달 이유식이 오히려 위생, 맛, 영양 면에서 낫다'는 설이 사실이라면 참 좋겠다. 그렇다고 소신 있게 배달 이유식을 하겠다고 선포하지도 못하면서, 요리 젬병인 내가 까다로운 이유식을 어떻게 만드냐고 앓는 소리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보석이가 아토피 피부 증상을 보이고 바꾼 분유에 알레르기를 일으켰다. 알레르기가 있는 아이라면 엄마가 직접 이유식을 만들어 먹여야 한다고 강조한 육아서의 한 구절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기를 낳으면 대부분의 엄마가 모유를 먹이려고 애를 쓰지만 아이를 조금 더 키워본 엄마들은 모유냐 분유냐 하는 것보다 이유식과 유아식을 잘 먹여 좋은 식습관을 만들어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좋다, 초기 이유식은 간단한 쌀미음이니 일단 부딪쳐보고 정 안 되겠으면 주문을 하든지 하자. 최소한의 준비물로 믹서기와 유기농 쌀을 주문하고 창고에 있던 새 냄비를 꺼냈다. 그랬던 나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은 이유식 만들기를 꽤나 즐기고 있다.
생각보다 초기 이유식 만들기는 어렵지 않았다. 처음에 먹이는 쌀미음, 찹쌀미음은 그냥 믹서기에 쌀을 갈아 냄비에 5분 정도 끓이기만 하면 된다. 맛이 있고 없고 차이가 날 이유도 없다. 그렇다 해도 첫날 부엌은 허둥지둥 엉망진창이 됐지만.
보석이의 인생 첫 술이었다. 구강기라 그런지 뭐가 들어오든 일단 입은 벌리고 본다. 엄마 아빠가 무엇을 먹으면 그렇게 애절하게 쳐다보더니, 그 무엇이 자기 입으로 들어오니 이 걸 뭐 어째야 되나 고민스러운 모양이었다. 입을 벌려 숟가락의 쌀미음을 받기는 했으나 삼키는 게 뭔지 모르니 다시 벌어진 입술 사이로 미음이 줄줄 흐른다. 혀로 밀어내지는 않아 다행인데, 첫 쌀미음의 반절은 턱받이가 먹었다.
먹을수록 흘리는 양이 줄고 집중하여 받아먹는 시간이 길어졌다. 보석이의 집중을 끌고 가는 나의 기술도 늘었다. 먹기 시작할 때는 배가 고파서 입에 들어오는 밍밍한 미음을 찹찹 잘 받아먹지만 이내 지루한 듯 허리를 돌리며 의자에서 탈출하려 한다. 쏘서에 달려있는 현란한 장난감들을 누르며 아이의 눈과 귀를 현혹할 차례다. 숟가락을 입에 넣으면 어찌어찌 목으로 넘어가는 모양이니 숟가락이 들어가도록 고개를 들고 있게만 해도 성공이다. 그것도 지겨워지면, 아이는 숟가락을 뺏으려 든다. 제가 먹겠다는데 아무래도 숟가락 자체가 먹는 건 줄 아는 것 같다. 숟가락을 뺏기면 그때부터 먹이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진다. 그렇다고 억지로 숟가락을 빼앗으면 식사 시간을 즐겁지 않은 경험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숟가락을 한 개 더 챙긴다. 가져간 숟가락은 치발기처럼 우물거리게 두고 나는 다른 숟가락으로 한 술 떠놓고 입 안이 비기를 기다린다. 치발기가 된 숟가락을 잡은 손 힘이 살짝 덜해질 때면 재빨리 이유식이 들어있는 숟가락을 입으로 들이민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나고 나니, 알레르기에 대한 걱정이 옅어지면서 서둘러 희멀건 쌀미음이 아닌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졌다.단 맛, 고소한 맛, 상큼한 맛, 구수한 맛, 쌉싸름한 맛 등 세상에 얼마나 많은 맛이 있는지 몰랐을 아이의 미뢰에 새로운 재료를 더하는 사흘 간격으로 축제가 열릴 것이다! 노랗게 분유를 탄 젖병을 보여주면 어서 내놓으라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이 먹보 아기가 다양한 맛을 담고 있는 세상의 수많은 식재료들을 만나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사실 나는 음식에 관심이 적은 사람으로, 의무감에 끼니를 해결하는 때가 더 많았다. 그런데 내 아이가 난생처음 먹는다는 행위를 경험한다니 눈이 소복이 쌓인 길에 첫발을 내딛는 듯 조심스럽고 맘이 설렌다. 이 식재료가 어떤 맛일지, 어떤 향이 날지, 어떤 영양분을 공급해 줄지 하나하나 새롭게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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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찹쌀, 감자를 먹여본 후 바로 소고기 미음을 주기로 했다. 생후 6개월이 되면 출생 시 가지고 있던 철분이 다 소진되어 철분이 많이 함유된 음식, 특히 소고기로 보충해주어야 한다. 안 그래도 원래 통잠을 자던 보석이가 부쩍 초저녁에 소리를 지르며 깨는 일이 잦아 철분 부족이 걱정되던 차라 소고기 이유식이 반가웠다.
이유식용 한우 안심을 사러 이 동네 이사 와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정육점을 향해 유모차를 끌고 울퉁불퉁한 길을 달렸다. 아기가 먹는다고 하면 유기농, 무농약, 무항생제 딱지가 붙은 식재료를 사야 할 것만 같다. 내내 이렇게 먹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유기농이니 무농약이니 붙어있어도 과연 믿을 수 있는가 싶지만 오만 가지가 다 가슴 떨리는 첫 아이 엄마로서 주변에서 하라는 건 일단 해봐야 마음이 편하다. 조금 노하우가 생기면 타협점을 찾게 되겠지만 우선은 친환경 제품을 찾아 유모차는 달린다.
200그램에 3만 원 가까이하는 소고기를 샀으나 정작 아기 먹을 미음에 들어가는 건 20그램이다. 너무 많이 냉동하기도 찜찜하여 100그램은 살살 구워서 남편과의 아침식사 상에 내놓았다. 입에서 사르르 녹는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이럴 때 쓰는 것이구나! 비싸서 인지, 적어서 인지 몰라도 평생 먹어본 고기 중 손에 꼽히는 맛이었다. 정작 보석이는 이 게 얼마나 부드럽고 맛이 깊은 한우인지 알지도 못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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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를 베이스로 브로콜리, 사과, 오이 등을 차례로 시도했다. 살면서 거들떠보지도 않던 야채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연구하고 섬세히 다루고 있다. 당근을 오래 냉장 보관하면 질산염이 쌓여 아기에게는 좋지 않다니, 전혀 몰랐다. 내가 모르는 치명적인 정보가 있을지 몰라 각 재료의 세척과 보관, 요리법을 일일이 숙지하려니 시간이 배로 걸린다.
냉동한 이유식도 일주일 내로 먹는 게 좋다고 하니 무작정 많이 만들 수도 없다. 폭염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이틀에 한 번 꼴로 이유식을 만드는데, 요령이 없어 식기 분리 세척과 열탕 소독 등에 시간이 한참 걸린다. 보석이가 자는 동안 혼자 하얗게 불태워 간신히 너 댓 개의 이유식 용기를 채우고 나면 나 자신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는지 놀라워 피식 웃음이 난다.
후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배달 이유식을 활용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이유식을 직접 만들어 먹이지 않으면 큰 일이라도 날 듯 고민한 게 쑥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어차피 달리기를 시작한 이상 조금 더 뛰어보겠다는 완고한 고집이 생겼다. 어쩐지 사온 이유식보다 내가 만든 이유식은 더 열심히 먹이게 된다. 반신반의한 맛의 결과물인데 아이가 찹찹 받아먹으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온몸을 이유식으로 범벅한 보석이 사진 한 장에 나는 오늘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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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면 중기 이유식으로 넘어간다. 믹서기로 다 갈아버리던 초기와 달리 3mm 크기 입자로 죽을 만든다. 재료도 한 번에 두서너 가지씩 들어간다. 초기 이유식에 겨우 익숙해졌는데 또다시 긴장이 된다. 단호박과 몇몇 야채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신중하게 식단을 짜야한다.
때때로 내가 아이 먹는 것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본다. 다들 처음에만 이렇게 예민하지 둘째 때는 대충 해 먹여도 오히려 편식 없이 잘 큰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집착에 가까운 노력의 과정을 거쳐야 대충 할 수 있는 깜냥도 생길 것이며, 이 기회에 각 식자재와 대화를 나누며 구매요령, 요리법, 보관법을 터득해보는 것도 내 인생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내 노력을 통해 아이가 음식의 다양한 맛과 식감을 즐기고, 좋은 음식을 먹어 자기 몸을 소중히 관리하는 능력을 터득하면 좋겠다.
언젠가 훌쩍 커버린 아이와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를 먹으며, 이유식을 만드느라 좌충우돌하던 일을 떠올리는 날이 올 것이다. 장성한 아들의 단단한 뼈와 근육에 내 땀과 눈물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에 조용히 미소 짓고 싶다. 그 날을 기대하며, 남아있는 이유식 설거지를 하러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