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와 사색_ 24 우리 부부의 아킬레스건
육아와 가사 분담에 대한 불만이 독버섯처럼 자라나 나의 온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걸어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가도, 예민한 주제를 만나면 마음이 다시 얼어붙었다. 예민한 주제란 바로 남편의 배드민턴 레슨, 관계를 급랭시키는 부부 사이의 아킬레스건이다. 남편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출산 이후로 가장 많이 마음 수양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보석이가 태어난 2월, 남편은 내 요구에 따라 즐겨하던 배드민턴을 쉬었다. 한 달이 지났을 때 배드민턴을 다시 하고 싶다고 통사정하길래 마지못해 허락했는데, 실은 아기가 태어나고 첫 한 달은 조리원과 산후도우미 기간이라 남편의 할 일이 별로 없었기에 나도 잘 몰라 저지른 실수였다.
도움의 손길이 모두 떠난 3월 육아는 오로지 나 혼자였다. 신생아기를 막 넘겨 등센서가 발동한 보석이를 안고 소파에 망부석처럼 앉아 남편의 배드민턴 레슨을 허락한 나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밤새 수유하고 아이 달래느라 꼬박 못 잤던 날 아침, 커다란 배드민턴 가방을 들고나가는 남편 꼴이 얼마나 쳐다보기도 싫던지. 다음 달에는 배드민턴을 나가지 말라고 확실히 요구했고, 남편은 3개월 더 쉰 후에 배드민턴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내가 직장에 다니기로 결정하면서 다시 배드민턴 문제가 수면에 올라왔다. 나는 아침 일찍 출근하고 남편은 오후 1시에 출근한다. 당연히 오전에 시간이 있는 남편이 아이를 시댁에 데려다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오전에 배드민턴 수업에 있어서 난감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취미활동의 위기를 맞은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무던히 노력했으나, 이해는 커녕 화가 났다. 나는 취미생활은 커녕 먹고 자는 기본적인 생활도 보장받지 못하고 육아를 해왔다는 설움이 터져나왔다. 더욱이 나는 직장에 다니기로 한 결정에 미안함을 갖고 싶지 않았다.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남편이 점점 미워졌다.
그렇다고 남편이 아이를 데려다놓는 일을 못하겠다 선언한 건 아니었다. 수일간 말도 없고 시무룩해 있었을 뿐이다. 어느 날 답답하여 남편의 생각을 캐물었더니, 남편은 괴로워하며 말했다. 자신에게 배드민턴이 꽤 높은 우선순위 기는 하다고. 아무 생각도 안 할 수 있으니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워낙 과묵한 남편이 자신의 감정에 대해 말한 건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얼어붙었다. 그리고 전혀 공감적이지 못한 반응을 했다.
“그렇겠지. 누구나 운동하면 아무 생각 안 나고 스트레스가 풀리겠지. 누구라도.”
남편은 다시 감정표현의 문을 닫았고 내일 이야기하자고 했다. 남편과 대화를 이어가고 싶다면 나는 우선 그의 욕구를 수용하는 태도를 취했어야 했다. 남편이 평소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은지, 이렇게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데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지를 먼저 헤아리며 대화를 풀어갔다면 오히려 남편이 배드민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시 서먹한 상태로 돌아섰다.
그간 남편의 성격을 봐온 바로는, 배드민턴을 치든 안 치든 내가 직장에 다니면서 그가 맡게 될 새로운 책임들을 묵묵히 수행할 게 분명하다. 다만 하지 않던 새로운 부담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 나에게 애매모호한 태도로 비쳤을 것이다.
나로서는 남편이 조금 더 흔쾌히 육아의 책임을 가져가 주기를 원했지만 그건 남편이 가질 수 있는 개별적 마음을 존중하지 못하는 일방적인 요구다. 남편을 향한 내 마음이 롤러코스터를 타며 오르내리지만 결국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귀결되듯이, 새로운 책임에 부담을 느끼지만 결국은 받아들일 남편의 심경 변화를 이해하고 기다려야 한다.
젊었을 때 그는 결혼 생활을 감정(애정, 욕구, 열정, 갈망 등)에 대한 축성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못지않게 하나의 제도로서도 중요하게 인식한다. 관계자들의 감정에 잠깐씩 일어나는 그 모든 변화에 낱낱이 주목하지 않고 한 해 한 해 굳건히 버틸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제도로서 말이다.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한 감정 변화에 낱낱이 주목하지 않고 긴 세월을 굳건히 버틸 수 있도록 해주는 게 결혼이라는 약속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큰 생활의 변화를 앞두고 나도 민감해져 있는 게 사실이다. 정신을 차리고, 남편에게 다시 살갑게 말을 건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