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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is libris Jun 14. 2020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이 자신에게 닥친다면? 믿고 싶지도 않아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가끔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영화나 소설, 뉴스를 접한다. 원망과 분노, 그리고 수치심으로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에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다.


나의 아들이,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라면 어떨까?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 사건명만 들어도 충분히 끔찍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 사건 이후 남겨진 가족들의 삶도 사건만큼 끔찍한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라 예상한다.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단 한순간도 웃을 수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든다. 가해자라니, 피해자도 아니고 가해자가 나의 아들이라니…. 하루아침에 살인자의 부모가 되어버렸다.




1999년 4월 20일,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는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콜럼바인고등학교에 갔다. 두 사람은 학생 열두 명과 교사 한 명을 살해하고 스물네 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딜런 클리볼드는 내 아들이다. 

(중략) 

그 끔찍한 날 뒤로 16년이 흘렀다. 그 열여섯 해를, 나는 아직도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데에 바쳤다.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강렬했다.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 그리고 그의 부모. 사건이 발생한지 16년이 지난 후에 그들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사회에서 격리되어 숨어서 생활하는 은둔 생활을 이어가고 있을까? 지탄을 받고 남은 삶 자체가 온통 후회와 괴로움으로 물들지는 않았을까?


끔찍했던 사건의 기억을 또다시 떠올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픈 기억은 빨리 잊히길 바라는 희망처럼 시간이 지나 이제는 조금 덜 힘들어하게 되었을 때 되돌릴 수 없는 그 날의 기억을 다시 재생시켜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딜런을 괴물로 그려 콜럼바인의 비극이 보통 사람이나 가족들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인상을 준다면,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안도감은 거짓일 것이다. 나는 진실을 이야기함으로써 그런 식으로 달랠 수 없는 더욱 무시무시하지만 중요한 취약함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고자 한다.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는 현장에서 스스로 자살을 했지만, 두 가해자에게 쏟아지는 지탄과 비난에서 가족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단순히 모든 책임을 아이들에게 떠넘긴다고 그의 부모들은 죄책감에서 벗어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음을 받아들여야 했고,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기억을 끄집어내서 이야기하고, 진실과 마주하고,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그들이 가해자의 가족으로써 사건을 이겨내는 방법이었다. 


그들의 용기 있는 선택을 존중한다.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지속해서 되뇜으로써 혹시 놓치고 있었던 것은 없는지 돌이켜본다.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가정은 불안정했을 거라는 편견이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너무나도 평범한 가정이었고, 일상을 보냈다. 단지 그날을 돌이켜 봤을 때 아이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자만했다는 생각을 떠올린다. 내 아이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이 이런 끔찍한 사건을 막지 못한 가장 큰 원인처럼 느껴진다. 많은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위로라도 건넬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나는 심오한 말을 해줄 줄 몰랐고, 사실 살인자의 엄마가 해주는 조언이 달가울 리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위로를 줄 수 있었다.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희생자들에 대한 용서는 평생 기대할 수 없는 과분한 희망이지만, 용서받지 못한다고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진정한 속죄인지는 다시 한번 고민해 봐야 한다. 아프기 때문에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그대로 방치한다고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되뇌면서 제2, 제3 유사 사건을 예방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성숙한 반성이란 어떤 것일까? 아픈 기억이라고 모른 척 넘어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듯싶다.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은 지나간 과거를 마주했을 때 비로소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청산할 수 있는 과거가 있을까? 이제는 지난 일이라고, 다 해결된 일이라고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너무 많이 잊고 지낸다. 오히려 그때는 조금 부족했다고, 너무 어렸다고, 내 잘못이었다고 인정하는 순간부터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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