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is libris Jun 24. 2020

잘 노는 연습

뉴타입의 시대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 자유롭게 쉴 수 있는 시간이 가장 간절했다. 수면 시간을 줄여가면서 공부하고 일하면서 침대에서 쉴 수 있는 시간을 기다렸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하루 동인 생활할 에너지를 잠깐 충전하고는 다시 하루를 버텼다. 쉬고 놀 수 있는 시간이 있어도 제대로 놀지 못했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무엇인가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언제나 충분한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부족한 시간에 어떡하면 잘 노는 것인지 고민할 겨를도 없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운동도 하고,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모임에 나가서 사람들과 어울려도 보고, 가끔은 여행도 다녀왔지만, 여전히 잘 놀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노는 것에는 선천적으로 재주가 없어 보였다.


대학생 때 제법 많이 들었던 잔소리가 '잠은 제때 자라'와 ‘집에만 있지 말고 좀 밖에 나가 놀아라’였다.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름 타당한 이유를 만들어 냈다. 영어 공부도 해야 했고, 자격증도 따야 했고, 학과 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었고, 면접 준비에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나름 열심히 살고 있다 생각했다. 잔소리에 대응하는 내 대답은 거의 같았다. '시간이 없다.'였다. 봉사활동도 해야 하고, 스펙도 쌓아야 하고, 경진대회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불평을 털어놓았다.


가끔 매체에서 요즘 학생들의 치열한 일상에 관한 뉴스를 접한다. 그들의 삶을 볼 때마다 일찍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마 부모님도 '놀 시간이 없다'는 항변을 듣고는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리라. 서서히 노는 방법을 잃어버리는 무서움도 잘 노는 것에 대한 중요성도 알지 못했다.


사회 초년생 때 어쩌다 한 번 주말에 사무실에 출근을 했는데, 차장님이 자리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고 어쩐 일이시냐고 여쭤봤던 적이 있다. 주말인데 사무실에서 나와야 하는 상황에 안타까웠다. 하지만 걱정은 곧 사라졌다. 차장님은 그리 바빠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눈치채셨는지 내게 거의 매주 사무실에 나온다고 말씀하셨다. 아직도 차장님이 왜 주말 출근을 자처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혹시 노는 것이 무서우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나도 노는 것을 제법 무서워했다.


바쁘게 대학 시절을 보내고, 정신없이 사회생활을 하면 여유 시간이 있어도 무엇을 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생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것과 낭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자기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하면서 논다는 사실 자체에서 거부감이 들게 된다.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이 초조했고, 비어있는 일정에 굳이 일을 만들어 넣었다. 한두 시간 꾸벅꾸벅 졸다가 다시 집에 돌아오더라도 가방을 메고 도서관에 갔고,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열리는 수업을 들었다.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꼭 일이 아니더라도 비어있는 스케줄을 취미도 채워 넣고는 숙제처럼 따라 했다.




여가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풍요로운 시대가 도래한다고 생각했을 때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국가나 개인은 없을 것이다. 오랜 세월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가르침만 받았지, 즐기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특히나 별다른 재능이 없는 평범한 사람에게 여유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두려운 문제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 「설득의 에세이」 


야마구치 슈 《뉴타입의 시대》 




놀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과정이었다. 잘 놀아야겠다는 부담감이나, 놀아야 한다는 의무감, 의미 있게 놀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항상 따라다녔다. 시간을 알차게 보내거나 잘해야 하거나 성공적인 결과물을 남길 필요도 없는데, 임무를 받아 완수하는 것처럼 놀았다. 게임에서는 이겨야 하고, 운동이든 요리든 실력은 늘어야 하고, 무엇을 하든 망치거나 실패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시간 낭비는 나쁜 것이고, 실패와 패배는 의미 없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신을 낭비하는 시간이 반드시 나쁜 행동은 아니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노는 것에 의미가 있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계속 서툴러도, 발전이 없어도 괜찮았고, 노는 것도 반드시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오랫동안 몰랐다.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지만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한적하게 걷고, 천천히 느끼고, 여유 있게 호흡한다. 서툴지만 굳이 잘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제법 긴 시간을 들인 결과물이 형편없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직접 그리고, 만들고, 부르고, 연주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아직도 게임에서 지면 조금 분하지만 금세 잊는다.


익숙하지 않은 시도를 하는 것도 제법 재미있다. 계획 없이 충동적인 하루를 부지런하게 보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잘 노는 것이란 바쁠 때는 숙제처럼 하던 일들에 재미를 붙이는 것이 아닐까? 일할 때는 그렇게 놀고 싶더니, 막상 놀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노는 것을 일처럼 하려 한다. 의미 없이 즐기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깊이 있는 사유는 항상 필요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