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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is libris Aug 18. 2020

포기가 더 어려울까? 시작이 더 어려울까?

뉴타입의 시대

드디어 오늘이다. 결과가 나오는 날이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벌써 세 번째 실패다. 처음에는 연습 삼아 봤다고 생각했고, 지난번에는 간발의 차이로 아깝게 커트라인 안쪽에 들지 못했다. 이번에는 왠지 결과가 좋을 것 같다. 아니 좋아야 한다. 결과가 좋아야 이 생활을 끝낼 수 있고, 끝도 안 보이는 이 케케묵은 골방에서 탈출할 수 있다. 웹사이트에 접속한다.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수험 번호와 생년월일을 입력한다. 확인 버튼을 누르고 결과가 나오는 시간이 3초도 걸리지 않았지만, 심장이 뛴다. 결과는 불합격이다. 이번에도 실패다.


4년제 대학을 8년 만에 졸업한 이유는 여러 번 실패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실패는 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들인 노력이 아까웠고, 패배자로 남고 싶지 않았고,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고, 이미 앞서 나간 이들을 영영 따라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안 되는 것들을 붙잡고 있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 결국 어디라도 들어가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을 맞닥뜨려서야 실낱같은 희망을 믿으며 붙잡고 있던 것들을 놓아버릴 수 있었다.


사실 잘 안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록 크지 않은 차이였지만, 그 몇 점 안 되는 차이를 극복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실패를 인정한다는 사실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경쟁에서 지고 싶지 않았고, 영영 낙오자의 길을 걸어야 할 것만 같아 두려웠다.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막막함보다 패배를 인정해야 두려움이 그만둘 수 없게 만들었다. 매번 누군가에게는 지고 살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제대로 지는 방법을 몰랐다.





사람들은 변화가 많은 시대일수록 도전이 중요하다는 말에 대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좀처럼 새로운 일이 도전하지 못하고 기존 방식을 고수하면서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많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은 시작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갖고 있는 자원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 한정된 자원으로 계속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면 이미 해오던 일 중에서 더는 발전의 여지가 없는 일을 선별해 그만둘 줄도 알아야 한다. 


야마구치 슈 《뉴타입의 시대》 





하던 일을 그만두고 포기한다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쓰디쓴 패배감이다. 경쟁에서 충분히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하지만 그렇다고 패배를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내가 경쟁에서 이긴 그보다 실력이, 준비가, 노력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패배를 받아들일 수 있는 다른 이유를 만들어 낸다. 처음이니까 경험이 있는 사람들보다 불리했다고 이유를 만들어 위로하고, 결과는 아쉽지만 아깝게 떨어졌다고 스스로에게 패배에 대한 핑계를 만들어 낸다. 이유가 그럴싸할수록 그 핑계 뒤에 숨어 경쟁에서 졌다는 사실을 은근슬쩍 넘겨버리고는 하던 방식 그대로, 했던 노력을 똑같이 반복하며 다음을 준비한다.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만을 강조하고 낙오한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은 패배를 인정하는 과정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게다가 실패에 대한 절망감과 공포를 가중시키기도 한다. 결국, '이걸 그만두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 여기에서 패배하면 영영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어렵고 힘들고 괴롭지만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계속할 수도 없는 시간을 겪기도 한다.


이렇게 무한의 굴레에서 허우적대는 이들에게는 '패배를 인정해!'라는 따끔한 조언보다는, '포기해도 괜찮다'라는 위로가 더 필요하다. 지금 당장 너무나도 중요해 보이는 어떤 것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삶이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는다. 몇 년을 들여 노력해오던 일을 그만둔다고, 삶이 망가지거나 낙오자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도전에 실패했다는 씁쓸함은 있겠지만 포기했다는 사실만으로 삶 전체가 망가지는 일은 없다. 오히려 그 패배감에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포기하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어쩌면 무엇을 새롭게 시작해야 할지 너무 많아 고민이 될 수도 있다. 연애를 하다 보면 이런 가슴 설레는 사랑을 평생 다시는 할 수 없을 것 같고, 이렇게 괜찮은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지만 언제나 그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대체된다. 연애에서 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최소한의 준비이듯, 포기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첫 단추이기도 하다.


포기하는 것이 더 어려울까?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더 어려울까?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 이미 하고 있는 일보다 더 나을 거라는 보장은 누구도 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이 어렵고 힘들고 괴롭다면 과감하게 새로운 도전을 위해 이제껏 매진한 일을 포기하는 것도 훌륭한 선택이다. 더운 여름 눈앞에 있는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시고 싶다면 손에 들려 있는 책과 연필은 내려놓아야 한다. 우선 손에 들려있는 것을 내려놔야 물이든 커피든 맥주든 손에 들고 마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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