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세계
몇 가지는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 사람들은 소중한 것들을 포기해야만 하는 현실에 분노한다. 박탈감과 머리끝까지 나 있는 화를 풀기 위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한다.
인터넷을 켜도, TV를 봐도, 라디오를 들어도 화난 사람들의 얘기뿐이다. 누구 탓인지 밝혀지기만 하면 온갖 비난과 욕설과 비난을 퍼붓는다. 진실이 무엇인지, 사정이 어떤지 신경 쓰지 않는다. 화난 사람들은 포기한 대가를 받으려는 듯, 자신이 느낀 아픔을 똑같이 겪어보라는 듯 눈을 감고 난사한다.
지하철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한 남성을 보았다. 자신은 억울하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경찰까지 출동해서 남성을 말려보지만,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무력으로 남성을 제압하려는 순간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른 행인이 남성을 꼭 안아 주었다. 괜찮다고, 그래 화날만하다고... 쉽게 가라앉지 않던 흥분은 금세 사그라들고 남성은 억울하다는 말과 함께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화를 내는 그들은 어쩌면 억울함을 들어줄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쌓여 있던 자신의 억울함과 박탈감, 외로움, 힘듦, 상실감 같은 감정을 버릴 감정 쓰레기통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 버리면, 그렇게라도 떨쳐내고 나면 조금은 더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상실감에 젖어 부모보다 가난한 삶을 살아갈 거라 비관하는 젊은 그들의 미래가 궁금하다.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미래를 불행할 거라 단정 지어 버리는 그들의 모습은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고립의 산물은 아닐까? '라떼는 말이야’를 외쳐대는 기성세대 꼰대들과는 소통을 포기한 지 오래다. 어디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봐야 하는지, 어떤 조언을 들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다. 그저 SNS에 올라오는 사진들과 노골적으로 선동하는 언론의 이야기를 들으며 박탈감을 키워갈 뿐이다.
그들에게도 다음 세대들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야 하는 날이 분명 온다. 그들은 그들을 잇는 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할까? 분명 그들도 우리와 우리 앞 세대들과 똑같이 그들이 살아온 포기가 자연스러웠던 젊은 날을 되돌아보며 조언을 할 텐데, 그들의 조언이 궁금해진다. '사랑, 결혼, 꿈을 포기하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너희들이 겪는 일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우리가 했던 것처럼, 우리 앞 기성세대들이 했던 것처럼 진심으로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심한 조언을 말하려 할 것이다.
꼰대가 불통을 대변하게 된 원인은 다른 사람들의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몸소 겪었는데 어떻게 틀릴 수가 있냐고, 나처럼 힘든 시절을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나약한 소리를 한다고 상대방의 어려움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속 편한 고민이라고 결론을 내버리고는 색안경을 낀 채 변해버린 세상은 고생을 모른다고 한탄한다. 가끔은 오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하대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때도 있다. 조언을 듣기 위해 어렵게 털어놓은 진심은 하찮은 어린애 고민거리고 전락해버리는 경험을 맛본다. 무시된 젊은 감정은 또 화풀이 대상을 찾는다.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조언들을 들어보면 어설픈 충고들 뿐이다. 가끔은 전쟁통에 겪은 절박함이 21세기도 동작하길 요구할 때도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서 하는 위로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혹독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소통은 멈췄다. 아마 그전부터 멈춰 있었겠지만, 이제는 회생 불능 상태가 되어버린 것 같다. 듣는 사람은 귀를 막고 말하는 사람은 입을 막았다. 마치 오늘과 어제 사이의 모든 다리가 파괴되어 버린 듯하다.
들으려 하지 않는 기성세대들에게, 오래된 것은 낡은 것이라고 들으려 하지 않는 젊은 세대들에게, 그리고 어설프게 자신만의 개똥철학으로 일선에 자리 잡은 세대들에게도 《어제의 세계》를 시작하는 이 짧은 글을 들려주고 싶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문자를 통해 100년 이후의 이들과 소통하려는 그의 시도는 아직도 유효하다.
우리의 오늘과 어제 사이의 모든 다리는 파괴되어 버렸다. 나 자신으로서는 단 하나의-물론 이 이상 더 불쾌하고 위험할 수도 없는-인생이라는 짧은 동안에 우리가 압축한 그 충실한 밀도와 다양한 모습에 대해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을 내 조상들의 생활 방식과 비교해 볼 때는 한층 더 그러한 것이다. 나의 아버지, 나의 할아버지는 도대체 무엇을 보았던가? 그들은 모두 인생을 일률적인 형태로 보냈다. 그들의 인생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단 한 가지 인생인 것이며 물론 상승도 전락이라는 것도 없었다. 그것은 경악과 위험도 없는, 말하자면 사소한 긴장이나 알아차릴 수 없는 이행(移行)뿐인 생활이며, 같은 리듬 속에서 천천히 조용하게 시간의 파도가 그들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데려갔던 것이다. 그들은 같은 나라, 같은 거리에서 살았으며 거의 언제나 같은 집에서 살았다. 바깥세상에서 일어난 일은 단지 신문 속에서나 일어난 것으로 그들의 집안 문을 두드리지는 않았다. 그들의 시대에도 전쟁이 어디에선가 일어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의 사정과 비교해 볼 때 보잘것없는 작은 전쟁에 지나지 않았으며 멀리 국경 언저리에서 일어나다 만 것이었다. 사람들은 대포 소리를 듣지 못했고 반년이 지나면 그것도 잊히고 사라져 역사의 말라빠진 한 페이지가 되었고 그들은 다시 옛날대로 같은 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다시 돌이킬 수 없게끔 살았던 것이며, 이전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아무것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전에는 역사가 아끼기나 하듯 하나의 나라나 하나의 세기에 할당해 주던 것을 최대한으로 경험할 수 있게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맡겨졌던 것이다. 어떤 세대는 기껏해야 하나의 혁명을 체험했고, 다른 세대는 소요를, 제3의 세대는 하나의 전쟁을, 제4의 세대는 기근을, 제5의 세대는 국가의 파탄을 체험했다. 그리고 혜택 받은 많은 나라와 세대는 그러한 것을 전혀 체험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60세의 나이를 먹고 아직도 상당한 세월을 남겨 놓고 있는 우리는, 도대체 보지 않았던 것이 있었던가, 받아 보지 못한 고통이 있었는가, 함께 체험하지 않았던 것이 있었는가?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한 모든 파국의 카탈로그 구석구석까지 파헤쳤다. 그런데도 아직 그 마지막 페이지에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 《어제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