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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is libris Aug 03. 2020

배고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간절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꼬마 돼지만 집에 남았어요.” 카야는 철썩이는 파도를 보고 말했다. 조각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카야는 별안간 판잣집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복도에서부터 오빠 이름을 소리쳐 불렀지만 조디의 물건들은 이미 사라지고 바닥의 홑청도 홀딱 벗겨져 있었다.

카야는 오빠의 매트리스에 털썩 주저 앉아 하루의 끝이 벽을 타고 스르르 미끄러지며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해가 저문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빛이 머물다 방 안에 고였다. 아주 짧은 찰라 어지러운 침대며 묵은 빨래 더미들이 바깥의 나무들보다 훨씬 또렷하고 다채롭게 보였다.

카야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허기에 놀랐다.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일상적인 허기. 부엌으로 가다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언제나 빵을 굽고 강낭콩을 삶고 생선 스튜를 보글보글 끓이는 열기에 뜨거웠던 방이었는데, 이제 부엌은 퀴퀴하고 고요하고 어두웠다. “이제 밥은 누가 해?” 카야는 소리 내어 물었다. 사실 ‘이제 누가 춤을 추지?’라고 묻고 싶었지만.


델리아 오언스 《가재가 노래하는 곳》




눈이 내리는 한겨울에 시작된 연애는 두 번의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는 막을 내렸다. 뜨거웠던 날들이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달달한 시간을 보냈지만, 서로가 바라보는 목적지는 달랐고, 그 틈을 좁힐 수가 없었다. 처음 겪는 이별도 아니지만, 헤어짐은 언제나 아프고 슬프고 아팠다. 누군가가 떠나간 그 자리에는 허전함만 남았다.


이별이 지나간 자리에도 여지없이 허기가 몰려왔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녀에게서 이별이라는 통보를 받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에 빠져있었음에도 언제나처럼 허기는 몰려왔다. 매번 하는 이별인데 웬 주책이냐라는 듯 배에서 꼬르륵 소리를 냈고, 소화시킬 것을 달라고 짖어댔다.


침대에 한참을 더 누워 있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냉장고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제야 오늘 종일 아무것도 먹은 게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입안으로 무엇을 넘기고 싶지 않았다. 이별에 대한 상실감에 슬퍼하는 중이라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이별을 더 아프게 슬퍼할 것처럼 보리차 한 컵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물을 마셔서 그런지 배에서 더욱 크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  '배가 고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외환 위기로 IMF의 지원을 요청했다는 뉴스가 하루 종일 TV에서 들려올 때쯤 아버지의 사업도 더는 운영할 수 없게 됐다. 몇십 억 원이라는 빚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매일 집에 찾아왔고, 그중에는 행패를 부리는 이도 있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상황을 한국에서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아버지는 미국행을 결정하셨다. 미국에 살고 계시는 먼 친척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직장이라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지금 미국으로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몰랐다. 빚을 지고 도망치다시피 선택한 미국행에서 무엇도 예상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을 하고 미국행을 결정하신 것인지는 모르지만 한국에서의 재기는 본다는 미국에서의 새 출발을 선택하신 것은 틀림없었다. 얼마나 긴 헤어짐이 될지 알지도 못한 채 아버지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 나는 아버지를 공항까지 배웅했다. 아버지와 함께 지나쳤던 지하철역을 나 혼자 되돌아왔다. 더 이상 의지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짧은 지하철 안에서 느꼈다.


집으로 돌아와 평소와 다름없이 저녁을 먹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원래 집에는 우리밖에 없었던 것처럼 저녁을 먹고 TV를 봤다. 밤늦도록 TV를 보다가 잠을 자려는데, 허전함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부재 때문에 허전함을 느낀 것인지, 속이 비어 허전함을 느끼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사춘기 청소년의 식욕은 왕성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라면을 끓이고 있는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배가 고프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아버지와의 그 이별의 의미조차 알지 못한 채 허기를 해결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밤늦게 야근을 하고 기숙사로 걸어가는데,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짧은 말 한마디에, 나는 “네, 알겠어요.”라고 짧게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기숙사에서 하얀 셔츠와 검은색 양복으로 옷을 갈아입고는 택시를 잡아탔다. 이미 너무 늦었지만, 마음은 급했다. 할아버지께서 누워계시던 병상에서 할아버지를 뵙고 싶었다. 마지막은 이지 지나갔지만, 더 늦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다행히도 할아버지는 익숙한 병상에 익숙한 모습으로 누워계셨다. 손은 창백했지만,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치열하게 싸우셨던 흔적이 환자복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침대에 누워계시는 할아버지를 뵈면 울음이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다행히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할아버지 손을 잡고 싶었지만 무서웠다. 그냥 우두커니 할아버지 옆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병상을 정리하고 외삼촌과 장례를 치를 장례식장 정리를 했다. 밝은 얼굴을 하고 계시는 영정 사진을 올려놓고, 향을 피우고, 국화꽃을 가져다 놓고, 상을 펴고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갈 때까지 거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일가친척, 동네 어르신, 전우회, 어머니와 외삼촌들의 오래된 동창, 친척들의 지인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튿날 이십년지기 친구 녀석들이 밤늦게 찾아오기 전까지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녀석들과 앉아서 허기진 배를 달래면서 소주 몇 잔 마시고는 바로 잠이 들어 버렸다.


다음 날 아침은 조용했다. 일어나서 대충 세수를 끝내고 발인을 준비했다. 할아버지가 누워 있는 관을 들고 장지로 이동하기 전에 생전에 할아버지께서 기거하시던 집을 들렀다. 할아버지께서 주로 사용하시던 방은 한 바퀴 돌고, 집 주변을 도는 동안 어머니와 다른 가족들은 소리 내어 슬퍼했다. 그렇게 할아버지께서 생활하시던 장소를 둘러보고는 행렬은 장지로 향했다.


장례를 모두 마치고 온 가족들과 밥상에 앉았다. 사흘 만에 마주한 얼굴은 그 전보다 핼쑥해 보였다. 우리는 조용하게 간단하게 차려놓은 밥상 앞에 둘러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느 명절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구성이었지만 할아버지만 계시지 않았다. 온 가족들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을 방금 보내드리고 오는 길이었지만,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가족은 밥은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배가 고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영영 배가 고프지 않을 것만 같았다.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도입부에서는 모든 가족이 폭력적인 아버지를 떠나간다. 처음에는 엄마가, 그다음에는 큰 오빠와 언니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디가 떠났다. 집에는 이제 아버지와 카야 둘만 남게 되었다. 모두가 떠나고 혼자 남게 되었다는 상실감과 막막함에 절망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허기가 진다는 사실에 놀란다.


소설 속 카야도 ‘배가 고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거의 모든 것을 바꿔 놓을 절망감을 맛본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게 된다. 슬프지만 무엇을 먹을까 떠올려야 하는 자신이 역겹게 느껴지고, 입안에 까끌까끌한 밥알을 쑤셔 넣고 오물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처량해서 보기 싫다. 이럴 때는 정말 배가 고프지 않기를 바란다. 며칠 동안만이라도 헤어짐에 실컷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으면 좋겠다. 어차피 며칠 지나면 툭툭 털고 일어날 거라면, 며칠만이라도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자비를 내 내장들이 보여줬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이를 볼 수 없다는 슬픔에도, 누군가와 이별했다는 절망감에도, 삶의 축이었던 누군가를 떠나보낸 비통함에도 여전히 허기가 진다는 사실에 놀라다가도 동시에 내일을 무사히 보내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사실에 새로운 희망을 본다. 언제나 그랬듯 툭툭 털고 침대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고 뭘 먹을까 고민하는 순간이 있기에 그 어떤 어려움도 흘려보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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