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싶다
전철 안에서 잠깐 졸았다가 눈을 떴는데 신기할 정도로 머리가 맑아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매일 아침 그렇게 개운하게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침에 이부자리를 가볍게 박차고 일어나서 하루를 정말 기분 좋게 시작한다면?
여러분은 아마 아침에 눈을 떴는데 피곤이 풀리지 않아서 일어나기 힘들거나 머리가 멍해서 이불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경험을 일상적으로 하는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당장이라도 일어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몸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경우 말이다.
(중략)
아침을 지배하는 자가 하루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미국의 유능한 사업가가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오전 중에 처리해야 하는 업무를 단숨에 끝내고는 아침을 먹으며 회의를 한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가지무라 나오후미 《나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싶다》
가끔 이런 부류의 글을 보면 그동안 얼마나 피곤하고, 열심히 살아왔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조차 사회적 성공과 연결해 더 나은 생활을 위한 하나의 노력으로 간주한다. 이런 작은 노력들이 우리 삶을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들어 줄 거라는 기대와 믿음이 있기에 끊임없이 시도하고 노력하고 좌절하고 피곤해한다.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피곤하다. 피곤하지 않은 아침을 기억해내기 힘들 정도로 피로와 친숙한 일상을 보낸다. 어차피 피곤한 하루에 피로를 조금 더 얹는다고 달라질 게 있겠냐고 생각하는 듯하다. 충분히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있음에도 피곤한 하루에 또 다른 노력을 늘린다. 그렇게 늘어난 노력은 여지없이 피곤함으로 돌아올 것을 알면서, 그 상태에 익숙해지면 괜찮다고 말하는 것을 참으로 대단해 보인다.
오래전부터 이른 아침 기상하는 습관에는 특별한 힘과 신비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은 환상이 있었다. 그 비밀을 발견한 특별한 사람들과 우리를 갈라놓고는 그쪽에는 무엇이 있을 것이라 착각하게 만든다. 언젠가 나도 그 성공한 부류에 속해보겠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겠다' 마음을 먹고는 알람을 평소보다 세 시간이나 일찍 맞춰놓은 적이 있다. 처음 며칠은 제법 일찍 일어나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보냈다. 일찍 일어나서 딱히 할 일은 없었지만 여유롭고 한가한 아침 분위기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았다. 아침 일찍 피곤한 몸을 일으키며 조금 더 자야지와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지가 매일 충돌했다. 10분만 더 자야지, 조금만 더 누워 있다가 일어나야지 하다 보면 어느새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이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이 정도가 되면 '어차피 같은 시간에 일어날 거라면 늦게라도 잘걸…'이라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예전 생활 패턴으로 돌아와 버렸다. 결국 다시 출근 시간에 맞춰 일어나 급하게 샤워하고, 양치하고, 옷 입고, 밥 먹고, 시간 맞춰 뛰어 나가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아침형 인간과 더불어 저녁형 인간에 대한 나름의 예찬이 생겨난 이후로 얼마 전부터는 '퇴근 후 한 시간'이라는 키워드가 주목을 받고 있다. 퇴근이 비교적 자유로워(?)지면서 퇴근 후에 시간 활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운동을 시작하거나 그림이나 악기 같은 새로운 취미 활동을 찾는 사람도 있지만, 자기 계발을 위한 시간으로 사용하는 이들도 제법 많다.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재테크를 위해서 부동산이나 금융을 공부하고, 언어나 말하기 같은 수업을 듣는다. 남는 시간에 새로운 일을 찾아서 하는 N잡러가 열풍이고, 인터넷 쇼핑몰, 배달 알바, 유튜브와 같은 신종 부업(?)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우리나라에 우버(Uber) 서비스가 들어왔다면 아마 우버 스비스까지 포함되었을 듯싶다. 그렇게 녹초가 될 때까지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효율적으로 쓰겠다고 다짐하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렇게 실천하는 걸 보면 부지런한 건지, 대단한 건지, 성공에 대한 집착인 건지, 악에 받쳐 누가 이기나 해보겠다는 건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다.
성공에 대한 집착은 대부분 경쟁에서 우위에 서야겠다는 강박에서부터 온다.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비교와 경쟁에 노출이 되어 있다. 친구와 같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하고, 같은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동료와 좁은 취업문을 통과하기 위해 싸운다. 그 과정은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너무나도 잔인하다. 집 안에서의 자아와 사회에서의 자아가 따로 있다고 말할 정도로 경쟁에서 뒤처지기 않기 위한 몸부림은 치열하다. 뒤처지면 안 되고, 앞서 나가야 하고, 최소한 남들만큼은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참한 삶이 되어버린다.
요즘에는 학창 시절을 함께 보냈다고 얘기하는 것보다 입시를 함께 준비했다고 말하는 게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필요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취업 스터디처럼, 아니면 학원 동기들처럼, 조금 길게 입시를 함께 준비한 우호적 경쟁관계 같은 사이가 되어 버렸다. 우호적 경쟁관계에서는 목적을 달성에 성공한 부류만이 살아남다. 이런 시스템은 이미 동창회에서 동작하고 있다. 동창회에서 더는 그저 그런 생활을 하는 친구들은 보기 힘들어졌다. 아마 사회적으로 충분히 괜찮은 위치에 올라야 얼굴을 보여줄 생각인 것 같다. 아쉬워도 그렇게라도 어깨를 펴고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뼛속까지 자리 잡은 경쟁의 결과이고, 패배자는 기억하지 않는다는 무언의 합의가 낳은 비극이다.
언젠가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생활에 대해 토론을 하는데, 함께 토론하던 누군가가 나에게 "어른은 자신의 삶을 선택해서 만족하며 살면 되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니 불쌍하지 않으냐?"라고 반문을 한 적이 있다. 그 의미를 너무나 잘 알기에 얘기가 길어질까 싶어 "네, 그렇네요"라고 짧게 대답하고는 말을 더 잊지 않았지만 나는 사실 그의 생각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부모가 선택한 부유함(?)으로 물려줄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도시 생활에서 자녀들이 받을 수 있는 혜택이 무엇일까? 영화 〈캡틴 판타스틱Captain Fantastic〉가 시사하는 것처럼 건강한 지식과 지혜는 어디서가 아니라 어떻게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과거 부모님 혹은 부모님의 부모님 세대에는 경제적으로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 중에서 누구 한 사람만이 특별한 혜택과 지원을 독차지했지만, 그 책임은 가족 전체를 부양하는 짐을 짊어져야 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시대가 아니다. 공부를 하고 싶으면 빚을 지고라도 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은 이미 충분히 만들어졌다. 더욱이 과거 부모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희생하면서 가족에게, 그리고 자녀들에게 올인을 했다. 당장 자신들에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더라도 자녀들이 부양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할 거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실제로 자신들이 나이가 들고 경제적 여력이 없어졌을 때 그간 투자한 투자금을 회수받기를 넌지시 내비칠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부양의 의무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짐'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누구나 노후 준비를 하고, 기본적으로 먹고 살아갈 만큼의 사회 보장 제도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자녀에 대한 무리한 투자와 지나치게 양육에 큰 책임감을 느낀다. 주변에는 아직도 기러기 아빠들이 많다.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무리해서 삶의 터전을 바꾸고, 지출을 늘린다. 이런 노력은 자신들과 같이 힘들여 살지지 않았으면 하는 부모들의 욕심 때문일까? 아니면 남들이 자녀들에게 해주는 것만큼 해줘야 한다는 경쟁의식일까? 그것도 아니면 전통적인 부모상을 따르려는 그들만의 노력일까? 같은 선상에서 보면 딩크족을 이기적인 선택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의 가치관에는 우리 것이 소중한 것이라는 전통적인 부모의 가치관을 따라야 한다는 기저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주 긍정적으로 본다면 과거부터 내려오는 부모에 대한 가치관을 오늘날까지 지켜오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잘돼야 한다는 부담감, 남들보다 앞서 나가기를 바라는 부모의 기대는 아직도 대물림되는 중이다.
성공에 대한 집착과 그를 향한 노력은 우리를 피곤하게 만든다. 아침형 인간이 되는 것도, 퇴근 후 한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은 욕망도, 그 시간마저 또 다른 일을 하면서 남들보다 앞서 나가려는 노력도 개인적인 욕심이라고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끊임없는 기대와 부담감, 강요로 찌든 이들에게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지나친 경쟁을 부추긴 사회적 기대가 만들어낸 부작용인 것이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고, 무척이나 독특한 삶을 선택해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의 우려를 극복해야 하고, 누군가에게는 이기적인 선택이라고 지탄을 받을 수도 있다. 반대로 용기 있는 선택이라는 응원을 받을 수도 있지만 턱 없이 부족하다. 피로 사회를 살아오면서 소망이 생겼다면 더는 이런 짐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숨 쉴 틈 정도는 허락되는, 경쟁에서 뒤처져도 괜찮다고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하루빨리 찾아오길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