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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is libris Jul 29. 2020

글로 읽는 색

내 이름은 빨강

“그렇다면 자네는 한 번도 빨간색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빨강의 느낌을 어떻게 설명하겠나?”

“손가락 끝으로 만져보면 그 느낌이 철과 동의 중간쯤 되지.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뜨거울 테고, 손으로 쥐어보면 소금기가 아직 남아 있는 물고기처럼 느껴지겠지. 입에 넣으면 입 안이 꽉 찰 테고, 냄새를 맡으면 말 냄새가 나겠지. 꽃의 향기로 치면 붉은 장미보다는 국화 향기와 비슷할 걸세.”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색은 자체로 충분히 강한 인상을 남기지만 눈으로 읽어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가끔은 캔버스에 칠해진 색보다 문자로 쓰인 색이 훨씬 매력적일 때가 있다. 색과 문자의 만남은 색에 대한 선입견만큼 감상에 필터를 씌운다.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도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책을 읽어가면서 느끼게 된 사실이지만 세밀화Miniature라는 단어는 라틴 miniare에서 유리했는데 연단Minium을 칠한다는 의미가 있다 한다. 연단이 Minium은 다른 단어로 Red Lead이다.


연단Minium/Red lead



소설에서는 빨강의 느낌을 장미보다는 국화향에 가깝다고 했지만,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에서 홀리Holly는 빨강을 말하면서 두려움을 얘기한다.




Holly Golightly : 어느 날 갑자기 우울해질 때가 있죠?You know those days when you get the mean reds?

Paul Varjak : 슬퍼질 때 말인가요?The mean reds. You mean like the blues?

Holly Golightly :  아뇨. 슬플 땐 살이 찌거나 비가 올 때죠. 우울한 건… 아주 비참해요. 이유도 없이 갑자기 두려워지죠. 그런 적 없어요?No. The blues are because you’re getting fat, and maybe it’s been raining too long. You’re just sad, that’s all. The mean reds are horrible. Suddenly you’re afraid, and you don’t know what you’re afraid of. Do you ever get that feeling?

 

― 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e,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빨강을 느낀 날을 우울해질 때로 해석한 석은 너무 적절한 번역이지만 영어에서 우울함을 의미하는 블루blues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빨강reds을 넣음으로써 파랑과는 또 다른 공허함을 표현하려는 언어유희를 한글로 번역된 자막에서는 느낄 수 없어서 조금 아쉬웠다.


 《더 컬러 세계를 물들인 색》에서는 "바실리 칸딘스키는 「흰색은 침묵의 색이다. 그러나 죽음의 침묵이 아닌, 가능성으로 가득 찬 침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흰색은 시작 이전, 탄생 이전의 ‘無’의 상태를 나타냅니다.”라며 흰색을 신비화한다. 《소나기》를 쓴 황순원 작가는 (보라색) 도라지꽃을 죽음을 의미하는 색으로 만들기도 했다. (소설 소나기에서 도라지꽃을 좋아하는 소녀는 죽음을 맞이한다.)


로라 바카로 시거의 《세상의 많고 많은 초록들》에는 숲과 라임, 정글, 이구아나, 고사리 달빛, 흰 눈에 덮인 초록, 그리고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초록을 표현했고, 아트앤스터디 인문숲의 「색 인문학」의 일부에서는 파란색을 하늘에 비유한다. 하늘은 우리 눈에 보이지만 잡을 수도, 그렇다고 실체를 확인할 수도 없는 색으로 하늘은 늘 우리 머리 위에 존재하지만, 우리를 초월하는 존재, 마치 신의 표상 같은 색으로 파란색을 표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작품 전체에서 작가의 사상을 색으로 나타낸 경우도 있다. 러시아의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Mikhail Bulgakov는 당시 구 소련 정권에 비판적인 작품을 쓰면서 공산주의는 붉은색으로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왕정복고주의는 흰색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고요함 검정, 시들어가는 회색, 깨끗한 흰색, 뜨거운 빨강, 활동적인 주황, 명랑한 노랑, 상쾌한 초록, 차가운 파랑, 듬직한 인디고, 가슴 뛰는 핑크, 신비롭지만 외로운 보라까지 색상의 다채로움을 짧게라도 표현해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색을 입으로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그 표현을 글로 남긴다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 또 있을까 싶지만, 누군가에게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국화꽃 향기 같은 빨간색으로, 하늘 같이 높은 파란색으로, 침묵의 흰색으로 암흑 속에서 세상을 그려가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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