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아주 어렸던 나는 책상에 가만히 앉아 공부하는 시간을 견디지 못할 만큼 한 가지 일을 느긋하게 하는 법이 없었다. 밖에서 뛰어노는 것이 좋았고, 동네 친구들과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니는 생활에서 선천적인 즐거움을 느꼈다. 아마 그 나이 또래 많은 남자아이들이 그러겠지만, 나도 주의력 결핍 증상을 보인다고 생각될 만큼 산만하게 뛰어노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구몬인가 빨간펜이가를 했던 것 같은데, 매일 해야 하는 숙제는 10분 만에 후다닥 해치워버리고는 저녁 늦게까지, 엄마가 저녁밥을 차려놓고 내 이름을 부르며 동네를 돌아다닐 때까지 뛰어놀았다. 매일 꾸중을 들었고, 매일 같이 일찍 들어오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다음날이면 여지없이 나는 친구들과 놀고 있었고 엄마는 저녁을 차려놓고 나를 찾으러 오셨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엄마는 나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셨다. 태권도 학원이 아니라 왜 피아노 학원인지 이유를 물어보지도 못하고 손 계란 쥔 모양으로 손을 동그랗게 말아 손가락을 건반에 올려놓고는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치는 방법을 배웠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 피아노 연습을 했는데, 1년 정도 피아노 학원에 다니면서 바이엘을 다 배우고는 체르니를 배우기 시작할 때쯤 학원을 그만두었다. 나중에 다 크고 난 다음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피아노 학원에 다니면 성격이 차분해진다는 소문이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나 말고도 함께 동네를 누비던 친구들 여럿도 나와 함께 피아노 앞에서 얌전하게 앉아 한 시간 동안 피아노를 배웠다.
그 뒤로 피아노를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얼마 전 즐겨보는 책 관련 유튜브 영상을 보고 피아노에 대한 추억이 되살아났다. 책 유튜버 중에 피아노를 제법 잘 연주하는 유튜버가 있었는데, 그녀의 영상들에서 피아노와 음악, 악보, 쇼팽과 음약에 대한 책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에게도 초등학교 1학년 한 해 동안 피아노에 대한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너무 어렸을 때라 피아노에 대한 특별한 추억이나 애정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환경적인 이유로 클래식 음악에 조금 익숙하고, 피아노 연주 음악을 가끔 찾아 듣는 정도였다.
아름다운 화음, 탁한 화음, 파생적인 화음, 기초음을 생략한 화음. 버드 파월의 화음, 텔로니어스 멍크의 화음, 빌 에번스의 화음, 허비 행콕의 화음. 다양한 화음이 있습니다. 모두 똑같이 여든여덟 개의 건반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사람에 따라 이토록 화음의 여운이 달라지다니,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한정된 소재로 스토리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더라도 거기에는 무한한 - 혹은 무한에 가까운 -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건반이 여든여덟 개밖에 없어서 피아노로는 더 이상 새로운 건 나올 수 없다’는 말은 할 수 없겠지요.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피아노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부터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이 이렇게나 많은지 항상 신기했다. 고작 88개밖에 안 되는 건반으로 수백, 수천 곡의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뿐만 아니라 행진곡, 연주곡, 소나타, 야상곡, 심지어 뽕짝(?)까지 거의 모든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고작 88개 음계와 여러 음계를 동시에 연주하는 화음 정도로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음악으로 우리가 느끼는 거의 모든 감정과 분위기를 표현할 수 있으니 대단한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 시간에 DNA를 공부하면서 염기 서열이 고작 4종류의 염기서열로 유전자가 구성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사람의 유전자 분석이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닐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 A(아데닌), T(티민), G(구아닌), C(사이토신) 이렇게 4종류의 염기 서열의 배열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으니 그 배열의 순서만 알아내면 사람이 갖고 있는 유전 형질의 특성을 금방이라도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도 유전자 연구가 끝나지 않은 이유는 피아노 건반이 88개밖에 안 되지만 무한에 가까운 음악을 만들어 내듯, 고작 4종류밖에 안 되는 염기 서열로 역시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특성과 형질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혈액형, 별자리, 사주팔자, 그리고 요즘에는 MBTI 같이 사람을 몇 가지 유형을 나눠서 사람들의 특성을 단정 지으려는 시도를 한다. 마치 인생사가 희노애락喜怒哀樂으로만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려는 시도처럼 사람의 특성도 그리고 삶도 일부 기준으로 나누어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물론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인류도 백인종과 흑인종, 그리고 황인종으로 구분하는 것이 틀린 구분법은 아니다. 물론 더 세세한 다른 종류의 구분법이 많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자칫 그렇게 임의로 만들어 놓은 구분자로 스스로에게 열려있는 많은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된다. 16가지밖에 안 되는 개인적 성향으로, 눈에 보이는 몇 가지 조건들로, 주변 사람들과 비교한 단순한 특징들만으로 자신을 지나치게 몰아세우고, 지나치게 걱정하고, 지나치게 겸손하고, 그래서 지나치게 안일한 선택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질문을 만들어보면 몇 가지를 만들어 볼 수 있을까? 싸이월드 시절에 유행한 100문 100답처럼 나에 대한 100개의 질문으로 나를 충분히 설명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연애를 시작할 때도, 누군가를 새롭게 알아갈 때도, 상대방에 대한 몇 가지 사실만으로 상대방을 단정 짓는다. 그리고 상대방 또한 그렇게 나를 단정 짓는다.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똑같은 족쇄를 채운다.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굴레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는 다른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라고는 남들과 똑같은 몇 가지가 전부일지 모른다. 88개의 건반과 4종류의 염색서열처럼 내 손안에 들려진 것들은 너무나도 흔하고, 평범하고, 심지어는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 몇 가지 안 되는 것들을 가지고 거의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고, 현실로 만들어 낸다. 초라한 무기를 들고도 전쟁터의 영웅이 될 수 있고, 작은 펜 한 자루를 들고도 만인에게 희망을 주는 글을 쓸 수 있고, 작은 땀 한 방울로 온 국민을 들썩들썩하게 만든다.
누구에게나 모두 똑같이 88개의 건반이 주어졌을 뿐이고 우리는 그 피아노를 가장 나답게 연주하는 일만이 남았다. 우리 모두가 쇼팽이나 리스트처럼 유려한 연주를 할 필요는 없다. 언제나 그렇듯 진심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법이다. 가능성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항상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