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화면 속 정재승 교수님은 시종일관 웃음을 띤 얼굴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한다. 한 해 동안 들어야 하는 직무연수는 총 60시간, 연말이 코앞인데 내가 올해 들은 연수는 총 30시간. 부리나케 연수원 홈페이지를 방문해 재미있어 보이는 강의가 없나 기웃거리다 선택한 강의다. 제목은 ‘정재승의 스쿨 브레인.’ 청소년기 학생들의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과 사고를 뇌의 발달과 연관 지어 ‘전전두엽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충동적인 행동을 보이는 게 당연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하는 시기는 13세에서 18세까지입니다. 게다가 뇌 발달이 덜 돼 거짓말이 미숙하기까지 하죠.’ 하고 설명해주는 식이다. 청소년기를 지나지 않은 성인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른의 안경을 끼고 학생들을 바라보고 판단하곤 하는 교사들에게 ‘그때는 원래 그런 거예요. 그러니 선생님이 조금 이해해주세요.’ 하고 이해의 공간을 만들어준다. 강의는 교사로서 학생들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할 뿐 아니라 재미있다. (모든 현직에 있는 교사, 그리고 교사 생활을 시작하는 신규 선생님에게 필수로 수강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학생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된다.) 근데 사실 내가 교사라서라기보다 나 역시 뇌를 가진 인간이기에 재미있는 게 더 크다. 뇌는 평생 발달한다고? 뇌가 최고 기능을 보이는 시기가 46세에서 53세라고? 공부하고 나서 바로 자면 학습 효과가 더 좋다고? 뇌를 이해한다는 건 인간이 어떻게 프로그래밍 되어있는지를 안다는 거고, 그건 곧 나의 행동이 모두 나의 성격이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인간이라서’의 단순한 이유로 일어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청소년기 학생들이 쉽게 화를 내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교수님은 한 가지 실험을 소개했다. 상자 속 쥐가 있고, 상자에는 누르면 먹이가 나오는 버튼, 누르면 쥐의 뇌에 전극을 가해 성적 쾌락을 느끼게 하는 버튼이 있다. 버튼을 눌러보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학습한 쥐는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만큼 버튼을 누를 수 있다. 그중 2-30%의 쥐는 성적 쾌락을 느끼게 하는 버튼을 계속해서 누르느라 굶어 죽었다고 한다. 여기까지 들으면 오, 그렇군. 성적 쾌락이 그만큼이나 강렬하고 중독적인 자극이군. 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험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첫 번째 상자와 쥐 옆에 또 하나의 상자와 쥐를 두는데, 두 번째 쥐는 자신이 버튼을 눌러 보상을 받는 대신 첫 번째 쥐가 버튼을 누를 때 먹이나 성적 쾌락을 얻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먹이와 성적 쾌락을 충분히 제공받는다. 그래서 두 번째 쥐의 수명은 첫 번째 쥐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첫 번째 쥐에 비해 두 번째 쥐의 만족도가 낮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수명이 절반으로 줄 만큼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그만큼이나 행복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단 말이야? 교수님은 덧붙여 설명했다. 아무리 좋은 보상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원할 때 ‘내’가 선택해서 얻는 것이 행복과 만족감을 가져다준다고, 원하지 않는 시기에 찾아오는 보상은 불만족과 스트레스를 야기할 뿐이라고. 자율권, 선택권, 자기통제권은 모든 생명체의 행복과 직결되며 그것이 침해받았을 때 우리는 고통을 겪는다고 말이다.
실험 얘기는 그날 내내,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생생하게 내 안에서 머물렀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자극에 영문 몰라 하며 시름시름 앓았을 두 번째 쥐가 꼭 나 같았다. 누군가는 지금도 간절히 원하면서 준비하고 있을, 한때는 나도 간절히 원했던 자리에 있는데도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내게 문제가 있어서라고 생각했다. 생존을 위한 경쟁과 평가에서 비껴나 있고, 그래도 때묻지 않은 학생들을 주로 대하며, 일 년에 두 달이 넘는 방학과 네 시면 퇴근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만족을 이야기하는 건 내가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인 거 아닐까 의심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내가 겪었던 일방적이고 정답이 아니면 모두 틀리는 식의 교육 대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인간으로 만들어내는 수업을 하고 싶었는데, 학생들의 중간고사 성적과 등급 대신 지금 겪고 있는 감정과 그에 대처하는 법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나는 서술형 답안지에 in 대신에 on을 썼기 때문에 0.5점을 감점해야 하는지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결석계의 제출일이 교칙에 어긋나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은 출결서류 파일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렇다면 교사라는 직업은, 진짜 내가 선택했던가? 어렸을 때부터 ‘여자 직업으로는 선생님이 최고’라고 밥 먹듯이 이야기하던 아빠의 말이, ‘여자 교사는 신붓감 일 순위’라며 공공연하게 말하는 사람들의 인식이, 지원했던 스무 개의 회사에서 모두 탈락하고 ‘내게 남은 건 이것뿐이구나’하고 생각하게 했던 상황이 나를 이 자리로 이끌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선택은 정말로 내 것이던가? 만약 아니라면, 내가 하고 싶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이지? 그날 밤 내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와 깊이 잠들지 못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실험 이야기는 내게 오래 잊고 있던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일깨워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