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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cky Ha May 15. 2019

풋귤청 놀이




작년 10월에 제주로 내려오기 바로 직전인 9월 말일까지 나는 일을 했다 그 일이라는 것은 중.고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시작하여 아이 출산으로 4주 쉰 것을 빼고는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다. 그러니까 23년간을 쉬지 않고 한 가지 일만 해 온 것이었다. 학생들이 성적을 잘 받아오고 실력이 향상되면 마치 내가 성적을 잘 받은 듯이 기뻤다. 그러나 학생이 시험을 못 봐오거나, 공부에 흥미를 잃어 나와의 수업을 중단할 때면 내 삶 자체가 실패인 듯 무기력해지곤 했다. 나와 일이 동일체가 아닌데도 어느덧 일이 나 자신이 되어있었다. 일의 성과가 삶의 희비를 결정했던것이다. 늘 그 일을 그만두기를 꿈꾸었지만, 그 일을 하고 있지 않은 나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일을 그만두는 순간은 정말 갑자기 들이닥쳤다. 남편이 죽고 영국에 유학 중인 아들을 혼자서 뒷바라지해야 했기에, 장례를 치른 후 슬퍼할 새도 없이 일주일 만에 수업으로 복귀했다. 그때부터 3년간 일요일도 없이 아이들을 가르쳤다. 슬픔도 그리움도 외로움도 모두 가슴 저 밑에 그대로 가둔 채 오로지 아들의 학업을 중단시킬 수 없다는 생각 하나로 하루하루 살았다. 그러다 올 것 같지 않았던 그 날이 왔다. 7년의 유학 기간 중에 마지막 남은 1년의 학비를 맞추고 나니, 더는 일을 계속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등잔불이 기름을 다 태우고 사그라들 듯 가르치는 열정과 의욕이 사그라들었다. 더는 단 하루도 가르치기 위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꾹꾹 눌러 가슴 저 밑바닥에 가두었던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허망함이 장마에 도랑물 넘치듯 온 가슴에 가득 차 넘실거렸다.     


허겁지겁 도망치듯 제주로 내려와 가을, 겨울, 봄을 보냈다. 가을엔 두고 온 미련들을 떼어 내느라 제주의 오름을 오르고 또 올랐다. 겨울은 남쪽이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 추웠고, 눈도 많이 내려 육지의 겨울만큼 쓸쓸하고 길었다. 더욱이 직업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내가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자괴감이 들게 했다     


하지만 봄은 달랐다. 꽃과 봄나물들이 주는 생기도 한몫했지만 나를 설레게 한 것은 친구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친구와 나는 짧은 시간에 ‘나이가 들어가기 시작한’ 여성이라는 공통점으로 연대 의식을 갖게 되었고, 서로의 지나온 삶에 대한 이해와 존중으로 더없이 편한 관계가 되어갔다. 어느 날, 우리는 평소처럼 수다를 떨다 뭔가 재미있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그것은 우리만의 힘으로, 우리를 몰입시키고 보람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풋귤청을 만들어 팔아 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 일로 돈을 벌 목적이 아니었다. 우리가 열정을 바쳐 일하고, 그 일을 통해 즐거움과 의미를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돈 들여 해외여행도 가는데, 적은 돈으로 한 달 동안 놀면서 일하는 건데, 돈 좀 손해 보는 게 대수야? 우리만 재미있으면 목표 달성이지’라며 일에 뛰어들었다.     


풋귤을 딸 때는 귤나무만큼 키가 자란 풀들을 헤치고, 모기와 싸워가며 일하느라 고생스러웠다. 도시를 떠나 살아본 적이 없는 친구는 처음에는 모기며 벌레에 힘들어했다. 하지만 곧 익숙해졌고 그런 자신을 대견해 했다. 한 상자에 20Kg이나 되는 풋귤을 한 번에 4상자씩 따서, 옮기고, 씻고, 썰고, 설탕에 버무리는 일을 모두 우리 둘이서 했다. 숙성시킨 귤청을 큰 통에 담아 냉장고에 칸칸이 넣을 때는 또 얼마나 힘이 들던지, ‘올리고내리고’를 반복하면서 우리의 팔 힘도 세졌고, 요령도 생겼고, 일이 익숙해짐에 따라 무언지 모를 자신감도 커졌다.     


풋귤청을 예쁜 병에 담고 스티커도 붙여서, 선물용 상자에 넣어 육지의 지인들에게 먼저 선을 보였다. 결과는 대성공! 추석이 가까워지면서 주문이 밀려들어 밥 먹을 새도 없이 청을 담아야 했고, 준비한 청을 모두 ‘완판’했다. 친구의 세심함과 나의 저돌적인 추진력이 빚어낸 우리의 한바탕 놀이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내가 친구에게 물었다. “우리의 풋귤청 놀이를 한마디로 한다면 뭐라고 표현 하면 좋을까?”. 친구는 “자존감 회복”이라고 단숨에 대답했다. 우리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저 주어진 생활에 쫓겨 사느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존감’을 아예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스승이신 T 스님께서 ‘너의 인생에 주인공으로 살아라. 인생의 포로가 되지 말고, 프로로 살아라’고 하신 말씀이 새삼 떠오른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공이다. 나와 친구가 자존감을 아예 잊고 살았다면 가히 인생의 포로로 살았던 것이리라. 또한, 고단하기만 하고 재미와 의미가 없으면 일이요, 그 일 속에서 재미와 의미를 발견하고 보람을 느낀다면 세상에 놀이 아닌 일이 없지 않을까. 친구와의 놀이 제2탄, 한라봉청 담기가 설레임으로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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