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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cky Ha Jun 25. 2019

꿈꾸는 여자들

동백꽃차





그제 밤에는 소형 태풍 급의 바람이 불었다. 땅에 박혀있던 집 앞의 우체통이 뿌리째 뽑혔고, 꽤 자라 중간 크기의 나무가 된 정원수도 뽑혔고, 베란다 유리창이 깨졌고, 지붕 덮개들도 군데군데 떨어져 날아갔다. 마치 탱크가 집 앞을 지나가는 듯한 무서운 바람 소리에 밤새 잠을 설쳤다. 이 정도가 소형 태풍급이라면 도대체 태풍급은 어느 정도일까. 생각만 해도 무섭다. 그제의 태풍으로 나는 왜 제주의 옛집들이 지붕에 돌을 얹고 있는지, 왜 제주 전통가옥들이 돌담과 지붕 높이가 가깝도록 낮은지, 왜 제주 시골 농가의 마당이 잡동사니 하나 없이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듯 그렇게 말끔한지를  죄다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른 아침, 그나마 바람이 좀 잦아들어 달걀을 내먹을 욕심으로 지난주에 각종 폐자재를 얻어다 지어놓은 닭장이 걱정되어 가보았다. 닭장도, 세 마리의 중병아리들도 무사했다. 나를 보자 고놈들이 쪼르르 달려와 밥 달라고 삐약삐약 거린다. 잘 견딘 녀석들이 기특했다. 그래도 매일 밥을 주는 사람이라고 알아봐 주는 모습이 귀여워 모이를 주고, 부리로 톡톡 먹이를 주워 먹는 모습을 한참을 지켜보았다.    

  

지난밤 바람에 동백꽃들이 얼마나 떨어졌을까 궁금하여 소쿠리를 들고나갔다. 바람은 여전했지만 지난밤에 비하면 황송하게 많이 잦아든 터라 ‘뭐 이 정도 바람쯤은 살랑바람이지’. 바람 맛을 제법 본 제주 주민처럼 길을 나섰다. 


동네 돌담 가에 피어있던 동백들이 밤새 바람에 시달리느라 꽃잎들이 상처를 입고 여기저기 떨어져 흩어져 있었다. 상처 입어 꽃잎 끝이 선홍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한 아이들을 더는 상하지 않게 조심해서 주워왔다.

동백꽃 차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쪄서 말리면 이쁜 잎들도 변색될 터. 떨어진 동백꽃을 깊은 향과 자태를 머금은 꽃차로 다시 피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우리 여성들은 가정에, 경제활동에 매어 그 좋은 3, 40대를 대부분 고난과 상처로 보낸다.  다 피어 이쁜 모습으로 자신의 자아를 뽐낼 여우조차 없이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혀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 해진다. 잘 자라 주는 자식이 주는 행복이 크다며 자신을 위로하고, 무심하다 못해 이제 남보다 못한 남편에게 한 조각 위로를 기대하기는커녕, '부부란 원래 그런 거야', '가족한테 그런 거 기대하는 거 아냐'라는 주변 여자들의 자조적인 말에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하며 자신을 가짜로 다독인다. 그리고 기댈 곳 없는 쓸쓸함과 상처로 가슴은 황폐한 사막이 된다.    

  

그럼 에도 우린 반드시 다시 피어나고 싶은 열망을 가슴 저 밑바닥에 소중히 간직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꿈을 꾼다. '아이가 대학에 가고 나면, 아니면 결혼을 하고 나면 나에게도 못다 한 꿈을 조금이라도 펼칠 날이 오지 않을까, 남편이 더 나이를 먹어 기력이 떨어지면 술 좀 덜 마시고 집에 일찍 들어와서 나와 도란도란 시간을 보내주진 않을까, 그것도 아니면 어느 햇살 가득한 오후에 예쁜 찻집에 앉아 친구들과 한가롭게 온갖 수다를 떨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배우고 싶던 그림이나 자수, 재봉, 도자기, 사진, 비누며 양초 만들기를 하며 만족스럽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보고 싶은 옛 친구들과 어디 여행이라도 훌쩍 다녀올 날이 오지 않을까 ‘.


어쩌면 너무도 소박하여 이미 틈틈이 누렸어야 할 당연한 일상들을 꿈으로까지 승화시켜 가슴 저 밑바닥에 간직하고는 마치 꿈을 잊은 듯이 살아간다. 

  

나는 주워 온 상처 받고 일그러진 붉은 동백에서 아름다웠어야 할 한창때에 힘겨운 삶으로 찢기고 멍들었던 우리 여자들의 내면을 본다. 그 상처 받은 동백들을 데려다 말끔히 씻어 주었다. 찜솥에 넣어 살짝 숨만 죽인 후 꺼내보니 화려했던 색깔은 간데없고 품위를 지닌 고상한 색깔로 변해 있었다. 검우죽죽 했던 바람에 치인 상한 꽃잎은 어느새 생생하던 꽃잎과 구분할 수 없게 똑같은 색깔의 꽃잎이 되었다. 나는 이 동백꽃을 이레에서 열흘간 곱게 말린 후, 향 매김을 하여 따뜻한 물을 머금은 동백꽃 차로 다시금 활짝 피어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아시는가.

그처럼 화려하고 생생한 동백의 향을 맡아보면 거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동백에 약간의 열을 가해주는 고난(?)을 겪게 하면 뜻밖에도 향이 짙게 살아난다. 나는 젊고 싱싱하나 원숙의 향기가 미약했던 한창때의 우리보다 힘겨운 인생 여정을 겪고 난 지금의 우리에게서 스며 나오는 향기가 훨씬 깊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2018.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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