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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cky Ha May 24. 2019

엄마의 가방

엄마도 꿈을 가진 싱싱한 인간이었다.






수년 전의 일이다. 학원을 운영하느라 정신없던 시절. 초, 중, 고 학생이 모두 다니는 학원이었다. 저녁 해 질 녘쯤이면 초등과 중등이 맞물리는 시간이라 학원은 완전 포화 상태가 되고 데스크와 차량은 초만원이 되어 도저히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시간대였다. 그날은 아이가 학교에서 소풍을 갔던 날이라 부득이하게 그 시간에 내가 아이를 데리러 시외에 있는 아이의 학교까지 가야 했던 날로 기억한다. 전쟁터처럼 정신없던 학원에서 빠져나와 차를 몰고 가던 중 시내의 끝자락에서 신호 대기에 걸렸다. 그 시간대에 오랜만에 느끼는 한가함에 나는 마음을 풀어놓고 운전석 등받이에 기대어 무심코 앞 유리 건너편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켜졌고 지는 해를 배경으로 몇 사람이 느린 걸음으로 길을 건너고 있었다. 나는 정지선에 서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었다. 그 지나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보다 두세 걸음 뒤처져서 한 중년 부인이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들고 지친 듯 횡단보도를 건너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여자는 가방이 너무 무거웠는지 가방을 든 쪽의 어깨를 아래로 늘어트리고 걷고 있었다. 나는 그 여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나의 엄마는 젊은 시절 상당한 미인이었고 엄마의 연세에서는 드물게 고향의 명문 여고를 졸업했다. 아들이 넷인 집안의 무남독녀 외동에 막내딸로 태어나 손수건 한 장 빨아보지 않고 아버지와 결혼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명 ‘아씨’였던 게다. 그랬던 엄마가 아버지와 결혼을 하여 5남매를 낳고 살다 보니 우여곡절 끝에 식당에서 일하는 찬모 아주머니가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엄마는 병원 식당에 다녔다. 어떤 날은 밤새 반찬을 만들고 아침에 퇴근하고 또 어떤 날은 저녁 늦게 퇴근하곤 했다. 퇴근 시간이 바뀌어도, 계절이 바뀌어도, 해가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엄마의 검은색 손가방이었다. 엄마는 다른 엄마들처럼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핸드백이나 어깨에 메는 세련된 가방이 아닌 책이라도 넣고 다녀도 됨직한 투박한 가방을 손에 쥐고 다녔다. 그 가방은 엄마가 출근할 때는 홀쭉했는데 엄마가 퇴근할 때는 배가 불룩 불러있었다. 그리고 그 가방에서는 퇴근하는 엄마 몸에서 났던 음식 냄새가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나는 그 냄새가 너무 싫었다. 가난의 냄새요 비참함의 냄새 같았다. 그 가방은 병원에서 배식이 끝난 후 남아서 버려지는 반찬들이 우리 집까지 전해지는 ‘배달통’이었던 것이다.     


내가 고등학생 때 우리 집은 너무도 가난했다. 엄마, 아버지와 우리 오 남매는 월세방에 함께 살았다. 돈이 없어 수년을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그나마 막 모여 살기 시작한 때이다. ‘푸세식’ 화장실이었고 부엌도 물이 빠지는 곳이 없는, 그냥 밥을 해 먹는 공간일 뿐이었고 수도는 마당 한가운데 공동 수도였다. 그래서 다 자란 우리 집안의 여자들은 여름에도 몸에 시원하게 물을 끼얹을 장소조차 없었다. 고향을 등진 어설픈 도시 빈민의 삶은 80년대 후반인 그때까지도 이어지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가난하고 비참했던 시절, 너무나도 싫었던 엄마의 그 무거운 까만 가방은 우리의 일용할 찬이 되어주었고, 하루에 도시락을 두 개씩 싸 가지고 다녀야 했던 고등학생인 나에게는 필수 불가결한 내밀한 자존심을 지켜주던 도구였다. 그나마 매일 반찬을 바꾸어 싸가는 있는 집 애들 코스프레를 할 수 있게 해 주었으니.    

그때 우리 엄마 나이가 40대 초반이었다.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40대 여자도 꿈을 품고 사는지. 그냥 누구의 엄마일 뿐 꿈이 있고, 예쁘게 가꾸고 싶고, 자존심이 있는, 한 사람의 싱싱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하게 자식들 수발을 들고, 아등바등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고, 그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자식들을 탈출시킬 의무만을 지닌, 일하고 헌신하는 존재로만 여겼다.     






그날, 횡단보도에서 그 부인을 보던 날, 나는 그 시절의 엄마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만큼 엄마도 자기한테서 나던 음식 냄새가 싫었겠구나. 일을 마치고 무거운 반찬 가방을 들고 터덜터덜 골목을 들어설 때, 하루하루가 얼마나 비참하고 고단했을까. 그 시절의 엄마가 너무 가여워서 달려가 안아주고 싶었다. 그 나이가 되어보고야 그때의 엄마도 나처럼 꿈을 꾸던 사람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그녀의 꿈을 갉아먹고 성장한 것이었다. 이 빚을 다 어찌 갚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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