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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cky Ha Jun 10. 2019

우리집, 안녕

나의 살던 고향집 안녕






우리 가족은 이 집터에서 100년을 살았다. 고아로 자란 내 할아버지가 이 마을에 정착하여 이 집터에서 할머니와 혼례를 하여 자손들을 낳았고, 또 그 자손들이 장성하여 혼례를 하고 자식들을 낳았으며, 그 자손들의 자손들이 이 집에서 자랐다. 이 집터에 처음 자리를 잡으신 내 할아버지는 구순을 넘기시고 돌아가셨고, 내년이면 아버지가 팔순이 되시고 이 집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숫자만도 열다섯이 된다.     


할아버지는 삼 형제의 맏이로 고아가 된 동생들을 데리고 떠돌다 이 동네에 정착했다. 왜 고아가 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어린 나이에 떠돌다가 한 신부님을 만나 그 신부님의 아들처럼 살다가 성당의 공소가 있던 이 마을에 정착했다고 한다. 누구나 살기 어렵던 구한말 시대에 타향인 이 마을에 흘러들어와 남의 집 일을 거들며 겨우겨우 동생들을 건사하기가 얼마나 힘겨웠을까. 타고 난 성실함과 정직으로 부지런히 일하여 농토를 마련하고 동생들 살림을 내주고 할아버지도 할머니를 만나 결혼을 하셨을 터.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은 초가집 세 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당을 중심으로 안방과 작은 방과 부엌이 있던 본채, 사랑방과 소죽을 쑤던 부뚜막과 아궁이가 있던 바깥채, 그리고 소 외양간과 변소가 한 동으로 이루어진 디귿자 모양의 집이었다. 안채는 마당에서 돌과 흙으로 쌓은 단을 하나 올라가면 그 위에 높고 맨질한 마루가 있었다. 할머니가 거기에 앉아서 내 머리를 빗겨주던 생각이 난다. 그 집을 부수고 지금의 형태로 집을 지은 것이 내가 다섯 살 무렵이니 할머니가 머리를 빗겨주던 기억은 네 살 이전의 기억일 것이다.     


마당 구석구석엔 꽃이 가득했다. 할머니는 유난히 꽃을 좋아하셨다. 우리 집에는 언제부터인지 기억조차 없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해마다 제철이 되면 그 자리에서 어김없이 꽃을 피우는 다년생 꽃들이 있었다. 뒤뜰의 감나무 밑에 있는 분홍색 작약, 앞마당 왼편에 있는 백합, 그리고 대문 오른편에서 피는 흰색 소국이 그것이다. 내 나이가 쉰이니, 그 꽃들이 거기에 자리를 잡은 세월도 50해는 넘었으리라. 나에게는 가족과 같은 꽃들이다.    


내가 다섯 살 무렵 새로 지은 우리 집은 시멘트 집이었다. 방이 세 개, 큰 마루와 넓은 주방이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나와 추억을 함께한 공간은 지하실과 다락이었다. 마루 밑에 현관에서 들어가는 지하실이 있었는데 여름에 들어가면 습하고 서늘한 것이 축축한 냄새가 났는데 나는 그 느낌과 냄새가 좋았다. 거기에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잔치에나 쓰는 큰 살림들과 평소에 볼 수 없던 예쁜 많은 그릇이 있었다. 큰 소금 항아리에는 가을이면 떫은맛을 빼기 위해 주황색 감이 소금에 묻혀있곤 했다. 또 할머니가 비린 생선 말린 것을 보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 우리는 그 지하실에 맘껏 들어갈 수가 없었다. 크고 두꺼운 나무 뚜껑이 내려가는 계단을 덮고 있었는데 어린 우리가 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가 좋아서 가끔 지하실 문이 열릴 때면 할머니나 엄마를 냉큼 뒤따라 들어가 실컷 냄새를 들이켜곤 했다.     


다락은 언제나 할아버지가 누워계시던 안방의 아랫목 벽에 있는 문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거기에는 여러 개의 궤짝이 있었는데 오랜 사진첩이며 편지 뭉치, 그리고 붓으로 쓴 성경 필사본과 옛날 가톨릭 잡지 필사본이 있었다. 그 필사본들의 글씨는 모두 구한말의 것이어서 현대 국어에서는 쓰지 않는 신기한 한글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국어 시간에 배울 수 있었던 옛날 한글을 할머니한테 배워서 초등학생 때부터 읽을 수 있었다. 할머니와 같이 소리 내서 읽어 본 성경이며 초기의 천주교 잡지들이 나는 참 재미있었다. 그 궤짝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궤짝은 누런 한지에 한자가 쓰여있는 종이들이 들어있던 궤짝이었다. 붓글씨 연습할 때 쓰던 창호지 같은 종이인데, 한눈에 봐도 무척 오래된 것으로, 종이의 접힌 결 사이사이에 때가 껴있고 누렇게 부풀어서 창호지보다는 10배쯤 두꺼운 종이에 한자로 모르는 글씨들이 쓰여 있고 붉은 도장도 찍혀있는 종이들이 여럿 들어있었다. 그 궤짝은 할아버지가 오랫동안 간직해 오셨던 조상님들의 유물이라 했다. 하지만 내가 스무 살이 넘어 그 궤짝들의 행방을 할머니께 여쭈어보니 할아버지가 동네에 들어온 어떤 고물상에게 ‘팔아먹었다’고 하셨다. 지금까지 그게 남아있었더라면 ‘진품명품’에 의뢰하여 그 가치라도 따져 보는 건데... 아쉽다. 그렇게 하루 종일 들어앉아 궤짝들을 열어 옛날 사진이며 희귀한 글씨들이며 편지들을 보면 지루한 줄 몰랐던 곳이 바로 우리 다락방이었다.    


지난 주말에 남편이랑 군에서 휴가를 나온 아들과 함께 우리의 그 고향 집에 가보았다. 올봄에 연로하신 부모님이 그 고향 집을 떠나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그 집은 새 임자를 기다리고 있는 텅 빈 집이 되었다. 깊기만 했던 지하실도 이제는 텅 빈 채 정겨운 퀴퀴한 냄새만 희미하게 풍기고 있었고, 보물창고 같던 지하실도 이제는 낮은 지붕 아래서 휑했다. 예쁜 꼴들이 피어 있어야 할 마당엔 잡초가 무성했고 귀한 꽃나무들은 동네 사람들의 손을 탔는지 남아있지 않았다. 나의 아들은 그가 어릴 때 내가 일하는 동안 그 집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자라 추억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그냥 돌아 나오지 못하고 빈집의 여기저기를 사진으로 찍었다. 왠지 모르게 쓸쓸하고 마음이 먹먹했다. 아들과 나는 이렇게 같은 공간의 추억을 공유했다.




시간이 만드는 당연한 태어남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 사물일지라도 그것에 추억이 가득하면 생사 소멸을 같이하는 생물이다. 그러니 나에게 살아 숨쉬 던 나의 집, 너에게 안녕을 고한다. 나의 살던 고향 집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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