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어느 날 1
여덟 살 소녀는 두 무릎 위에 양 팔꿈치를 올리고 두 손바닥으로는 양 뺨을 받친 채 꽃인 양 마루 끝에 앉아 마당 한쪽에 막 몽우리를 터트리기 시작한 연분홍빛 과꽃을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 ‘저렇게 예쁜 색깔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소녀의 표정은 꿈속을 헤매고 있는 듯이 아련하고 행복한 표정이다. 앞마당 여기저기엔 온통 꽃이다. 집 울타리에는 소녀의 키를 훌쩍 넘고 꽃은 소녀의 얼굴보다 더 큰 노란색 해바라기가 줄지어 서 있고, 해바라기 사이사이엔 연녹색의 타원형 모양을 한 답싸리(댑싸리의 경기도 방언)가 해바라기 키에 절반쯤 높이로 자라고 있다. 해바라기 씨는 기름을 내거나 겨울에 심심풀이로 까먹는 주전부리가 될 것이고, 답싸리는 가을이면 할머니와 할아버지 손에 마당 빗자루로 묶일 것이었다. 마당 오른편에는 꼭지를 돌리기만 하면 시원하게 물줄기를 내뿜는 수도가 있다. 아직 소녀의 동네에는 뽐뿌(펌프의 경기도 방언)를 쓰는 집이 대부분이고 잘 사는 집이나 신식 물건을 들이는 것을 좋아라 하는 집에만 수도가 있는 시절이었다. 그 수돗가에는 넝쿨이 제법 뻗어서 수돗가에 응달을 만들어주는 포도나무가 있고, 봉숭아꽃과 노란 금잔화가 빙 둘러 피어있다. 마당 수돗가와 대청마루 사이의 둥근 화단에는 과꽃이며 채송화, 맨드라미, 달리아, 접시꽃, 아직은 한창 몽우리를 만들고 있는 색색의 국화들, 봄에 연보랏빛의 길쭉한 꽃을 피웠다가 지금은 크고 시원한 잎줄기를 무성히 뽐내고 있는 옥잠화, 이른 봄에 주황색 꽃을 피웠던 황매화 같은 것들이 터질 듯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래오래 보고 있어도 좀처럼 심심하지 않은 할머니의 화단이다.
그때 열린 대문 안으로 더러워 보이는 검은 옷을 입고 산발인 머리에 새끼줄을 둘러 얹은 이상한 아저씨가 주춤거리며 서 있다. 소녀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아! 예수님이 오셨구나!’. 할머니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이라고 하셨다. 특히 거지는 절대 그냥 돌려보내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한 번은 저녁밥을 먹고 있을 때 거지가 오신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 거지를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드시는 상에서 함께 밥을 먹게 했다. 하지만 동네 아이들은 거지가 동네에 들어오면 따라다니면서 놀리고, 심지어 돌을 던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소녀는 거지가 불쌍해서 동네 아이들이 미워지곤 했다. 소녀는 재빨리 광으로 달려가 무거운 광문을 열어재끼고 쌀 항아리를 연 다음, 제일 큰 됫박을 가져다 까치발을 한 채 항아리에 몸을 숙이고 매달려서 여덟 살 아이가 담을 수 있는 만큼의 쌀을 힘껏 퍼 담았다. 거지는 온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이빨이 누렇고 까맸다. 이상한 나쁜 냄새도 났다. 하지만 소녀는 더럽다는 생각보다는 거지가 웃으니 그저 온 마음이 환해지고 기뻤다. 왠지 모르게 쑥스러워 고개를 숙여 거지에게 인사를 했다.
거지가 돌아간 후 다시 고요해진 한여름 마당. 꽃을 보는 즐거움은 어느새 멀리 달아나고 슬슬 지루해지던 차에 새참을 내갔던 아가다언니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대문을 막 들어온다. 아가다 언니는 소녀네 집안일을 도와주는 열여덟 살 먹은 동네 언니다.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에 눈망울이 크고 얼굴이 갸름하며 숱이 많은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었는데, 웃을 때 도톰한 입술이 옆으로 커지면서 가지런한 하얀 윗 치아가 보이는 모습이 하도 예뻐서 소녀는 이다음에 커서 아가다 언니처럼 예쁜 아가씨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가다 언니는 아침마다 소녀가 학교에 가기 전에 머리를 빗어주는데, 출근 준비로 바쁜 엄마의 급한 손길보다 훨씬 부드럽고 양 갈래 머리를 딱 맘에 드는 위치에 삐뚤지 않게 빗어주어서 소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어쩌다 아가다 언니가 아침 일찍 오지 못 하는 날이면 엄마의 재촉하는 손길이 싫어서 소녀는 괜히 혼자서 심통이 나곤 했다.
오늘은 새벽부터 아버지랑 할아버지, 사촌 오빠가 논에 물을 푸는 날이다. 여름 가뭄이 심해 논에 물이 말라 있던 차에 수리조합에서 물을 내려보내면 양수기로 물을 퍼 논에 대는 것이다. 아가다 언니는 동네 앞에 있는 소녀네 논에 물을 대고 있는 집안 남정네들의 새참을 내어 주고 오는 길이었다. 소녀는 대문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아가다 언니의 손을 잡고 부엌까지 따라 들어가, 아가다 언니가 머리에 이고 온 광주리를 내리는 것을 도와주려 애썼다. 소녀의 그런 몸짓이 하도 앙증맞고 귀여워서 아가다 언니는 더위에 들길을 걸어온 힘겨움도 잊고 까르르 웃었다.
저녁을 먹고 온 가족이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동네에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몇 집 안 되던 시절이었다. 소녀의 집에는 텔레비전이 있었는데,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동네 마실 꾼들이 소녀의 집 안방에 텔레비전을 보려고 옹기종이 모여들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인 때라 저녁 뉴스가 끝나고 나면 새마을 운동의 모범 사례를 종종 방송해 주곤 했다. 코미디언 이기동이 농촌 마을을 찾아다니며 하는 방송인데, 오늘은 소녀의 엄마가 이기동과 함께 텔레비전에 나와 양동면의 모범 마을을 소개한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다. 엄마는 농협의 부녀부장이다. 엄마는 말솜씨와 목소리가 좋았고 인근 마을에서 보기 드물게 여고를 졸업했으며 얼굴도 예뻤고 행동에 품위가 있었다. 더구나 70년대에 남자들이나 타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정도로 활달했고 아이를 다섯이나 낳은 건강한 여자이었다. 드디어 엄마가 화면에 나왔다. 엄마는 오늘따라 더 예뻐 보였다. 소녀의 마음은 기쁘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지만 엄마가 틀리기라도 할까 봐 몹시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엄마가 TV에서 사라지자 큰언니를 비롯한 5남매는 서로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이제 겨우 네 살인 은수는 영문도 모르면서 신나서 팔짝팔짝 뛰었다. 엄마는 쑥스러워했다. 아빠도 흐뭇하게 웃으며 엄마에게 ‘잘했다’는 칭찬을 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별말씀은 없었지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소녀는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아빠도 기분이 좋았던지 이번 주 토요일 저녁에는 냇가에 텐트를 치고 가족 캠핑을 하자고 했다. 동네에서 텐트와 녹음기가 있는 집은 소녀네뿐이었다. 지난번 캠핑처럼 텐트며 솥, 이불, 녹음기, 닭고기, 술 등을 경운기에 가득 실을 것이다. 5남매는 모두 경운기의 꽁무니에 올라타고, 덜커덩거릴 때마다 환성을 지르며, 깔깔거리며 냇가로 갈 것이다. 냇가에 솥을 걸고 닭도 삶아 먹고 모닥불도 피우고 녹음기 소리에 맞춰 노래도 하고 춤도 출 것이었다. 소녀네 식구들은 모두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서 여름 밤하늘의 은하수를 바라보며 냇물 소리에 맞추어 밤이 깊도록 소리를 맞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