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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cky Ha Sep 16. 2019

생일이 뭐라고

생일 증후군의 철없음






나는 9월생이다. 해마다 9월이 오면 마음이 시리고 외로웠다. 언제부터 인지는 알 수 없다.    


올해 여름은 유독 힘에 부쳤다. 올봄에 갱년기 증상이 시작되고 처음 맞는 여름이다. 아래 혈압이 50까지 내려가서 맥이 풀리고 어지러운 증상이 일주일 넘게 계속되었고, 장염에 걸려 탈수 증상으로 여러 날 동안 링거를 맞으며 지내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라면 아침저녁으로 상큼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9월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예상을 뒤엎고 보란 듯이 나의 생체 리듬은 또 우울 모드로 바뀌었다.    


대학 때는 생일이 되면 자취방에 틀어박혀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나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냥 까무룩 히 자고 일어나면 하루가 다 지나 어느덧 밤이 와있기를 소망했다. 생일은 쓸쓸함과 외로움이 나를 삼켜버리는 그런 날이었다.     


용케 생일인 걸 알고 꽁꽁 숨어있는 나를 찾아오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부끄러움에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 넣고 나는 ‘생일 증후군’이 있노라며 눙치곤 했다. 어디서 그런 단어를 찾아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생일은 그렇게 침울하게 보내면서도 아끼는 사람들의 생일이 오면 없는 돈에 미역과 소고기를 사서 미역국을 끓여 아침을 함께 먹곤 했다. 그것이 내가 아는 가장 따뜻한 방법으로 벗들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방식이었다.     

왜 내 생일은 그렇게 잊히기를 소망하여 칩거하면서도 내 사람이다 싶은 사람들의 생일에는 지극정성이었을까.     


나는 5남매 중에 셋째로 태어났다. 큰 언니는 첫 번째 아이라서, 넷째인 여동생은 여자 막내라서, 아들인 다섯째는 기다리던 아들이라서.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그들의 생일을 기억하는 각각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둘째 언니와 나의 생일을 기억해주는 가족은 없었다. 친구들은 생일이라서 엄마가 떡을 해줬네, 미역국을 먹었네, 옷을 사줬네, 용돈을 줬네 했지만, 어릴 때부터 생일은 그저 나 혼자 기억하는 날일 뿐이었다.     


누구에게나 있는 그 날이, 한 살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에게는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는 날 인양 서글픈 날로 각인되어갔던 것일까. 주목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다른 사람보다 강해서, 그날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이었을까.     


여지없이 무너지는 그날에 대한 기대 앞에서 나는 그만 생일에 대한 의미가 나에게는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기로 한 것 같다. 그리고는 내 안의 동굴로 기어들어 가기를 선택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결혼을 하여 내 가족이 생기고 나서는 훨씬 나아졌다. 비록 미역국은 한번밖에 못 얻어먹었지만 늘 내 생일을 기억해주고, 축하해 줄 것이라는 당연함이 보장되어 있어서였을 것이다. 실제로 생일날 저녁에는 아무리 일이 바빠도 가족이 모여 외식을 했고 생일 선물과 카드를 아이와 아이 아빠로부터 꼬박꼬박 챙겨 받았다. 아이에게는 생일 카드나 편지를 강요하기도 했다. 자식 사랑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동했던 듯하다.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걸 자식에게만은 꼭 받고야 말겠다는 몹쓸 심리.    


아이 아빠와 사별한 후, 유학 중인 아들을 영국으로 떠나보내고 나는 또 혼자 생일을 맞았다. 아들은 9월 학기가 시작될 때 출국을 했는데, 한 해도 잊지 않고 출국 전에 생일 선물을 챙겨주었다. 그래도 가족이 함께하지 않는 생일은 다시금 나에게 서럽기만 했다.    


올봄에 나는 결혼을 했고, 쉰 번째 생일을 맞았다. 사랑하는 남편이 생겼고 아이들이 둘 더 생겼다. 남편은 내 생일 전날부터 미역국을 끓이고 조촐한 상을 차려 친정 부모님을 초대했다. 그래서였을까. 생일날이 이상하리만치 우울하지 않았다. 아주 평온하게 지나가더란 말이다. 군에서 아들이 걸어온 생일 축하 전화를 받으면서도 예전처럼 쓸쓸하고 서럽지 않았다. 평생 생일 미역국 한번 끓여주지 않은 부모님께도 더 이상 서운하지 않았다.  





   

생일도 쉰 번이나 해봤고, 가족도 더 생겼으니 철없고 미숙했던 시절의 ‘생일 증후군’ 타령은 이제 그만하련다. 생일이 뭐 대수라고. 우울하고 서럽다고 찡찡거리며 콧물 눈물 찍어내는 일은 정말 그만하고 싶다. 혹시 파파 할머니가 되어 노망이 나면 모를까. 이제 좀 철이 든 어른이 되어가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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