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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cky Ha Nov 13. 2019

 빨강머리 앤과 누룽지

빨강머리 앤과 보낸 며칠 ㅣ 상상력의 부재, 늙었다는 신호




     

책을 읽는 재미에 푹 빠져 며칠을 보냈다. 그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사흘 전 밤에 저녁을 부실하게 먹어서인지 늦은 밤에 출출했다. 뭘 먹을까 궁리하다가 문득 냉동실 안에 있는 슈퍼에서 사다 놓은 누룽지가 생각났다. 그 아삭하고 오독오독한 식감이 몹시도 ‘땡겼다’. 읽던 책을 놓고 냉장고로 급히 가 그릇에 바삭한 누룽지를 한판 담았다. 그리고는 다시 이불로 돌아와 조금씩 잘라 입으로 오물거리며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마당에 귤이 익어가는 제주 집 아랫목에 이불을 깔고 앉아 밖에 바람이 불거나 말거나, 선명한 가을 햇살이 귤에 달큼한 맛으로 스며들고 있거나 말거나, 하얀 달이 깜깜한 밤하늘 가득 달그림자를 그리거나 말거나, 며칠동안 온 정신을 폭 빠뜨리고 읽고 있는 책은 바로 ‘빨강머리 앤’에 관한 세 권의 소설이다.    


석 달 전쯤 우연히 브런치에서 ‘스몰스텝’에 관한 글을 읽고 다이어트 단톡 방에 가입하게 되었다. 거기서 멤버로 알게 된 김윤정 심리 상담가 선생님이 ‘개떡같이 말하면 개떡같이 알아듣습니다’(일명 개말개알)를 발간하고 ‘예스 24 중고서점 목동점’에서 ‘작가와의 대화’를 연다기에 응원차 갔다. 행사가 끝나고 오랜만에 간 서점이라 그냥 나오기 아쉬워서 책 구경을 했다. 중고서점이라 책값이 무척 쌌고 책들의 상태도 의외로 양호했다. 관심 있던 몇 권의 책을 골랐고 거기에 끼어 있던 것이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라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쓴 ‘빨강머리 앤’을 모티브로 그것의 연작으로 쓰였다. ‘빨강머리 앤’은 앤이 11살 때 입양되는 이야기부터 시작되는데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는 앤의 출생 배경부터 입양될 때까지의 이야기를 상상하여 쓴 또 다른 작가(버지 월슨)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명작이라고 평가받는 원작인 ‘빨강머리 앤’과 100년의 시간 차를 두고 다른 작가가 원작을 훼손시키지 않고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지. 그것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단순한 궁금증에서 읽기 시작한 소설은 어느새 나를 앤의 매력에 푹 빠져들게 했다. 앤의 불행한 삶이 너무 가여워서 울었고, 고단한 삶 속에서도 언제나 긍정의 힘으로 꿈꾸고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는 그녀에게 나는 푹 빠져 버렸다. 다른 작가의 연작소설임에도 분명 하나의 독립된 소설로서 완벽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앤의 시각과 그녀의 매력에 빠져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를 다 읽고 나서 나는 세수하는 것도 잊고 차를 몰고 도서관으로 갔다. 원작인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을 이어서 읽기 위해서였다. 가엾고 당차고 엉뚱하고 똑똑한 앤의 모습이 너무도 선명하게 나에게 다가왔고 그 느낌이 원작인 ‘빨강머리 앤’에서도 잘 이어지고 있을까. 그것이 너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원작인 ‘빨강머리 앤’의 완성도를 걱정할 정도로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는 원작을 뛰어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몽고메리의 원작인 ‘빨강머리 앤’과 버지 월슨의 ‘빨강머리 앤이 어렸을 적에’는 완벽한 하나의 소설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앤은 마침내 입양되었고 메슈 아저씨와 마릴라 아줌마의 사랑 속에서 삶의 가치를 오로지 ‘상상력’에 두고 상상에 기초한 각종 사건과 사고를 일으키며 너무도 매력적인 생활을 해나간다.     






‘빨강머리 앤’을 읽는데 정신이 팔려 늦은 밤 누룽지를 먹고 물 마시는 것도 잊었다. 새벽녘에 설핏 잠이 들었다가 뭔가 답답해서 깼다. 뱃속에서 누룽지가 불어서 목까지 누룽지가 차올라온 느낌. 급히 물을 한 그릇 마시고 또다시 잠에 빠졌다. 그리고는 아침에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먹고 또 앤을 읽었다. 점심 약속이 있어서 밖에 나가 샤부샤부를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밥다운 밥이라 양껏 먹고 집에 왔는데 기운이 쭉 빠지고 머리가 조여 오는 듯이 아팠다. 소화제를 먹고 앉아서 또 앤을 읽었다.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그제 서야 단단히 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밤 9시가 넘어 다시 소화제를 또 먹었다. 그리고는 눕지도 못하고 앉은 채로 막힌 위를 누르고 쓸어주기를 반복하며 앤을 읽었다. 몸은 점점 지쳐갔다. 새벽 4시가 넘어서야 겨우 쪽잠을 자고 날이 밝자 병원으로 갔다. 혈관 주사를 맞고 나흘 치의 약을 탔다. 2인분의 죽을 사고 도서관에 들렀다. 선생님이 되기 위해 사범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후의 앤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에이번리의 앤’(루시 모드 몽고메리)을 빌려 집으로 돌아왔다. 조금씩 속이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고통이 줄어들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나는 다시 앤을 읽기 시작한다. 뻑뻑한 누룽지를 먹고 체한 것도 모른 채 무언가에 푹 빠져 산 며칠이 참 행복하다.    




늙는다는 것은 몸이 아니라 감성이 먼저 무뎌지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나는 분명 늙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들이 덤덤하다. 마음에 감사와 감동이 확실히 줄었다. 앤은 사람의 가치를 상상력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한다. 이 ‘빨강머리 앤’을 읽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상상하기를 멈춘 내가 얼마나 재미없는 사람이 되었는지 깊이 깨달았다.  


   

상상력이라는 것은 사실 이해와 관용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타인이 나의 기준에 비추어 무례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할 때 그가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입장이 되어보는 상상을 하지 않으면 어렵기 때문이다. 늙고 아집이 세어지는 것은 바로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빨강머리 앤’을 읽으면서 앤에게서 상상하는 것에 대해 많이 배웠으니 나도 매사에 다시 상상력을 동원해 보기로 한다. 그러면 늙기를 잠시 멈추고 다시 재밌고 이해심 많고 매력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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