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의 들머리로 가기 위해 시내버스를 타고 ‘국민대학교 앞’ 정류장에서 내린다. 국민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귀국해 세운 유일한 민족 사학이며 초대 학장은 해공 신익희 선생이다.
학교 앞에서 북악터널 위의 능선을 바라보면 우뚝 솟은 봉우리가 인디언 바위이고, 그 오른편에 잘록하게 들어간 부분이 정릉에서 세검정으로 넘어가던 옛날 보토현이다. 보토현에 대한 이야기는 「명상길에서 만난 옛이야기(북한산둘레길 5구간 명상길과 보토현 고개)」 편에서 얘기하려고 한다.
형제봉 산행 시작을 평창동의 북한산둘레길 5구간인 명상길 출입문에서 시작해도 되지만, 우리 민속신앙이 깃든 삼곡사 굿당을 들러보고 싶어 이 길을 들머리로 잡았다. 북악터널 방향 오른쪽 인도를 따라 이백여 미터쯤 가면 삼곡사 굿당과 청학사로 가는 표지판이 나오고, 안부로 접어들면 삼곡사와 북한산 둘레길, 청학사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계속하여 삼곡사 이정표가 가리키는 길을 따라 올라간다.
산자락 계곡으로 들어서니 어디선가 꽹과리 치는 소리가 들리고 느티나무 신목(神木, 당나무)에 치렁치렁 묶어 놓은 오색천이 소매 끝동처럼 바람에 휘날린다. 무당이 굿을 금방 시작했는지, 신당 문 밖에는 통돼지 한 마리와 거나하게 차린 상이 무당이 접신(接神)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굿당 뒤로 난 계단을 오르면 큰 바위에 산신(山神)상과 기도처가 보이고, 오른편 바위에는 독성(獨聖: 나반존자)과 칠성(七星)이 화려하게 채색된 채 굿당을 내려다보고 있다.
바위에 새겨진 산신은 기호산신상(騎虎山神像)으로 품에 새끼 호랑이를 안은 채 어미 호랑이를 타고 있고, 오래 살고 부귀하고 아들 많이 낳기를 기원하는 발원문이 음각되어 있다.
옆의 다른 바위에는 삼명(三明)과 자신뿐 아니라 남을 이롭게 하는 능력을 지닌 독성과 인간의 수명과 길흉화복을 주재하는 칠성이 그려져 있는데, 여느 사찰의 독성과 칠성 그림 못지않게 화려하다.
삼곡사는 사찰의 삼성각처럼 산신·독성·칠성을 함께 봉안하는 격식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본래 절에서 삼성각(三聖閣)은 고려 말 3대 성승(三大聖僧)인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세 분의 대사를 봉안하던 곳이었으나, 조선시대 핍박받던 불교가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17~18세기부터 구복의 민간신앙을 받아들여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 삼성각 등을 절 안에 모시게 된 것이다.
(산신상과 발원문 각자)
계단을 내려와 굿당을 쳐다보니 돼지와 차림상은 신당으로 들여보냈는지 보이지 않고, 무당은 접신을 하였는지 한 마당 질펀하게 춤을 추고 있고, 굿을 부탁한 처자도 오색천을 손에 쥐고 무당을 따라서 춤을 춘다.
어릴 적 시골에서 굿하는 것을 보아온 터라 그리 낯설지는 않지만 도시의 굿은 색다른 느낌으로 와닿는다. 삼곡사에서 내려와 둘레길 이정표가 가리키는 산자락으로 오르면 북한산둘레길과 북악하늘길 이정표가 나온다.
삼태기에 안긴 평창동
형제봉능선을 타고 내려온 산등성이 고갯마루에서 평창 마을 언저리가 보인다. 이곳 산세의 지형은 새의 둥지처럼 북동쪽에서 뻗어 내린 형제봉능선이 구진봉을 거쳐 북악으로 이어지고, 북서쪽은 보현봉 사자능선이 병풍처럼 휘감으며 내려와 평창동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조선은 평창동이 풍수지리상 입구가 좁은 삼태기 모양이어서 재물이 빠져나갈 수 없는 지세라 여기고 이곳에 평창(平倉) 창고를 지어 군량미를 보관하였다. 고갯마루에 형제봉입구 개수대가 나온다.
여기서 형제봉능선 산행이 시작된다. 암릉과 나무데크 계단을 지나 황톳길 산기슭에서 만나는 금강송 군락, 그 숲에서 시원한 솔바람이 불어온다. 송진 향기를 맡으면서 오르는 능선길 저만치에 작은 암봉이 보이고, 암릉에서 고개를 들고 보니 소나무 숲 사이로 작은 봉우리가 살짝 보인다.
오름길의 끝자락에 있는 봉우리는 암릉에 철주 가드레일이 둘러져 있고,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가 뭍으로 올라와 숲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다. 거북바위를 지나 가파른 나무 데크 오르막 계단을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오른다. 데크 계단이 끝나는 길에 새처럼 생긴 바위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것처럼 나래짓을 준비하고 있다. 바위 밑에는 서너 명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동굴도 보인다.
새바위를 지나면 거대한 목탁처럼 생긴, 이름하여 소망바위가 나온다. 바위 아랫도리에는 뭇 등산객들이 소원을 빌면서 자기의 나뭇가지를 기대어 놓았다. 필자도 소망 나뭇가지를 바위에 기대어 놓으면서 소원을 빌어 본다. 소망바위를 지나 오솔길에 공룡 알처럼 생긴 바위가 보인다. 공룡 알바위 암릉지대를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흙 알갱이를 딛고 바위를 박차고 오른다.
작은 형제봉 정상이다. 암릉에는 철주 가드레일이 설치되어 있고, 장수의 칼처럼 생긴 바위가 하늘을 찌를 듯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정상은 북한산 남동쪽의 풍경과 도시의 전망을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작은 형제봉에서 내려가는 길은 서북쪽은 나무데크 계단이, 반대편 동북쪽은 철주 가드레일이 설치된 암릉지대이다.
큰 형제봉 사이에 또 다른 암릉지대가 나온다. 꼭대기에 올라 북한산 성곽과 시단봉, 보현봉, 힘차게 뻗어 내린 사자능선의 파노라마를 감상하면서 산 중턱에서부터 붉고 노랗게 물들어가는 가을을 온몸으로 느낀다. 산은 등성이를 소나무 숲으로 가린 채, 깊은 골짜기와 얕은 골을 오색 단풍으로 단장하기에 한창 바쁘다.
(형제봉 아래 평창동)
이정표는 대성문 2.0 킬로미터를 가리키고, 순한 큰 형제봉 오름길을 따라 정상에 이르니, 황토로 덮인 자그마한 마당과 가장자리에 쉬어가기 좋은 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습작 노트를 꺼내 놓고 자연과 계절과 산이 인간 세상과 같거나 다른 점에 대하여 나름 생각해 본다.
큰 형제봉을 내려와 일선사와 대성문을 가리키는 길을 따라 호젓하게 걸어가면 작은 암봉에 뜀박질 자세를 취하고 있는 개구리 바위가 얹혀 있고, 매가 새를 잡아먹었는지 새털이 사방에 널려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보현봉은 일선사를 품에 안고서 수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칼바위능선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승무를 추는 듯하다. 산은, 여자의 변신이 무죄이듯 산의 변신도 무죄, 매일 형형색색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눈에 담고 몸으로 느끼면서 변신을 기록하기 바쁘다.
대성문 1.5 킬로미터 이정표가 가리키는 한 곳에 눈길이 멈춘다. 오솔길에 참나무 몇 그루가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소나무와 뒤섞여 산기슭에서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나뭇잎은 붉은 진노랑으로 곱게 물들어가고, 팥배나무 열매는 새색시 볼처럼 빨갛게 익어가고 있다.
제법 두툼한 황토 고갯마루에서 평창공원지킴터와 동령폭포, 대성문 갈림길이 나온다. 데크 계단의 기둥에 ‘다래교’ 글자가 새겨져 있어 다래나무가 자라고 있나 하고 한참 둘러보아도 찾지 못한다.
이정표 일선사 0.4 km, 사찰로 가는 길은 빗물에 흙이 파이지 않도록 길바닥에 돌을 깔아 놓았다. 절 입구에는 포대화상이 미소를 지으면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어 다가가서 안내문을 읽어본다.
보현봉 중턱 일선사
“포대화상의 배꼽을 만지면서 아랫배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 번 돌리며 만진다. 포대화상이 크게 웃을 때 그 웃음을 따라 함께 웃으면 무병, 장수, 부귀의 세 가지 복이 생긴다“고 하여 필자도 좌불의 배꼽을 만지면서 따라 크게 웃는다.
일선사에는 일주문이 없고, 입구에 나무로 된 문과 ‘일선사 안내문’이 서 있다. 절에서 키우는 진돗개가 불성을 지녔는지 짖지도 않고 포대화상의 미소와 함께 필자를 따라온다.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창건 당시 보현사(普賢寺)라고 절 이름을 지었고, 고려 탄연 국사가 중창했다고 전하며, 조선초에 무학 스님이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 당시에 전소되었다.
(보현봉 아래 일선사)
다시 중창하면서 관음사(觀音寺)로 불리다가, 일초(一超) 스님 시인 고은이 주석하면서 절 이름을 자신의 ‘一’과 도선(道詵) 국사의 ‘詵’을 합쳐 일선사(一詵寺)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사찰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보현굴'이 있다. 주말에 형제봉 산행을 하는 등산객들이 평창동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절에 필요한 짐을 져 날라주기도 하고, 사찰에서는 점심 공양을 제공한다.
지난여름에 소나기를 만나 비를 피하기 위해 잠시 머문 적이 있다. 소나기에 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 여기 소개한다. 가뭄이 계속되는 여름 어느 날, 농부가 비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데 마을 앞을 지나던 스님이 곧 비가 올 거라고 얘기를 하더란다.
농부는, 햇볕이 쨍쨍한데 무슨 비가 오냐고 하면서 스님에게 농사짓는 소를 가지고 내기를 걸었다. 하는 수 없이 스님도 그날 탁발했던 쌀을 내기로 걸었는데, 곧이어 바람이 불고 하늘에 먹구름이 끼이더니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소나기는 농부의 ‘소내기’라는 말에서 비롯되었으며, 스님은 내기에 이겼지만 농부에게는 농사를 지으려면 소가 필요하니 도로 소를 돌려주었다고 한다.
일선사를 나와 보현봉 어깨를 감싸며 돌아가는 오솔길은 그야말로 명품길이다. 나무 데크에서 바라보는 칼바위능선의 멋진 자태, 산자락에 숨어 있는 멋진 바위 군상들, 핏빛보다 붉은 단풍나무 이파리, 그리고 구불구불한 황톳길, 이 모든 것들이 하모니를 이루어 길을 내고 숲을 가꾼다.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싱그럽고 상큼한 냄새는 코를 자극하고 폐부를 가득 채운다. 발걸음은 가벼워지고, 오솔길에서 어미고래가 새끼를 데리고 수면 위로 불쑥 전신을 내밀고 있는 고래 모자바위를 만나기도 한다. 고래바위를 지나 나무테크 계단 아래에 있는 ‘일선사 쉼터’는 한가운데 반석이, 그 둘레에 통으로 된 원목의자가 서너 개 놓여 있다. 그 옆에도 건너편에도 반석과 원목의자가 놓여 있어 보기에도 쉬어가기에도 참 좋다.
쉼터에서 나무데크 깔딱 계단을 올라서니 기와지붕이 살짝 보인다. 대성문의 문루가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성곽 주변은 온통 붉고 노란 단풍잎으로 뒤덮여 기와지붕과 함께 멋진 무대를 연출한다. 대성문 문루에 올라 커피를 마시면서 멋대로 우주의 그림을 그리고, 그러다가 마음대로 상상하고 방황하다가, 습작 노트를 꺼내놓고 나만의 작은 우주를 글로 옮겨 적는다.
문루의 기둥에 기대어 오랜 휴식과 긴 사유의 시간을 가진 뒤, 다시 일선사 쪽으로 내려가서 형제봉능선의 고갯마루에 있는 다래교 나무 데크 계단을 따라 하산한다. 하산길은 보현봉 사자능선과 형제봉능선의 골짜기가 만든 평창계곡으로 이어진다. 계곡의 물줄기는 졸졸졸 가는 소리를 내며 흐르다 한 곳에 모여 작은 여울을 만들고, 이내 큰 물줄기가 되어 폭포를 향해 내달린다.
(동령폭포 상단)
구름다리를 건너면 여러 골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모여 폭포와 담과 소를 만들면서 힘차게 동령(東嶺) 폭포로 향하여 내달린다. 폭포에 이르니 안내판에 지금은 휴식년이라, 그래서 가까이 가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볼 수가 없다. 푯말은 2022년까지 5년간 자연생태 보전구역으로 지정했다가, 생태 복원을 위하여 다시 2026년까지 연장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동령폭포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구로 대신하면서 아쉬움을 대랜다. 추사는 친구 황산 김유근(黃山 金逌根), 동리 김경연(東籬 金敬淵)과 함께 동령폭포를 구경한 뒤에 완당집에 “황산, 동리 제공과 더불어 동령에서 폭포를 구경하다”라는 시를 남겼다.
폭포를 뒤로 하고 내려가면 황톳길 끝자락에 평창공원지킴터 통나무집이 보인다. 아스팔트 길을 따라 왼쪽으로 내려와 ‘평창동 산림 제3초소’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마을 어귀에 있는 ‘김영희 강남 통태탕’으로 가서 시원한 동태탕 한 그릇에 오늘 여정을 마무리한다.
[참고자료]
이한성 동국대 교수, "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20", 「문화경제」, 2011.03.28
[산행안내]
<산행코스> 국민대학교 버스 정류장-삼곡사 굿당-북한산둘레길-인디언바위-보토현-북한산둘레길-형제봉 입구-일선사-대성문-(원점회귀) 다래교-동령폭포-평창동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