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에 유배당한 산으로 숨을 헐떡거리며 오른다. 「무진기행」 김승옥 작가의 말처럼 안개가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북한산을 빙 둘러싸고 있어서 봉우리들도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렸다. 이곳의 안개도 무진의 안개처럼 거대한 능선과 산봉우리를 모두 집어삼켜 버렸다. 북한산 구름정원길 하늘다리에서 안개에 휩싸인 소나무 더미를 보았다.
그들도 안개에 갇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며 몸부림친다. 그 몸부림에 바람이 일고, 바람 따라 안개가 일렁거린다. 바람에 밀려온 안개가 뒤엉켜 뿌연 물방울을 만들고, 풀어진 회색 안개 더미에 갇힌 소나무와 바위가 빛바랜 수묵화처럼 흐릿하게 보인다.
팔을 휘저으며 안개를 헤치고 오른다. 피어오르는 안개에 가로막혀 앞을 분간할 수조차 없을 만큼 아련하다.
거친 마사토와 바위와 암릉지대는 는개에 파묻혀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다.
고래등 같이 솟아오른 암릉지대를 지나자 옛적엔 암자 터였을 작은 공터가 보인다. 채비를 다시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절 터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절간 위에는 개구리를 닮은 바위가 등에 새파란 이끼를 한 짐 짊어지고 있는데, 봄을 기다리며 입을 꽉 다물고 있다.
공터를 뒤로 하고 오름막길을 오른다. 암릉 사이로 벌거벗은 아이 엉덩이를 빼닮은 그곳을 밟고 작은 산봉우리에 올라서니 안개비가 더욱 기승을 부린다. 불어오는 바람마저 차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안개 멜로디가 바람 소리와 함께 귓가에 맴돈다. 가수 정훈희가 부른 「안개」를 배경 음악으로 잔잔하게 깔고서, 안개 자욱한 가사로 시작하는 이 노래 하나만을 영화의 OST로 선택한 박찬욱 감독의 마음을 알듯도 하다.
침목 계단이 이어진다. 한참 이어지던 계단은 다시 만난 거대한 암릉 앞에서 존재감을 상실한다. 암릉 지대는 마치 성난 악어의 등처럼 위태롭고, 바람결에 안개 물보라가 휘몰아쳐 짐승처럼 얼굴을 핥고 지나간다.
등산로는 보이지 않고, 원목 가드레일이 서 있는 대로 올라서니 세 번째 암릉지대가 앞을 가로막는다.
(안개 낀 족두리봉 능선길)
안개에 유배된 산이라 했으니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앞을 분간조차 하기 힘들다. 봉우리는 안개에 파묻혀 보이지 않고, 그저 위만 바라보고 안갯속을 헤쳐 오를 뿐이다.
8부 능선에 강아지 얼굴 바위와 초현실주의 작가의 조각품을 빼닮은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건너편엔 유배당한 자연 분재 소나무 한 그루가 다섯 쌍둥이 가지마다 풍성한 솔잎을 매달았다. 느린 오르막 길을 지나자마자 네 번째 암릉이 길을 막아선다.
안개에 싸인 족두리봉
정상에 거의 다 왔다. 불광사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합류하는 오목한 등줄기에 쉼터가 있다. 이곳은 거북의 모가지처럼 편편하고 움푹 들어간 곳이기에 거친 숨을 고르기에 좋은 곳이다. 족두리를 닮은 거대한 암릉에 다가서려면 화살표가 가리키는 대로 안전한 바위 틈새로 올라가야 한다. 정상에 올라서니 거센 바람이 몰아치고, 안개마저 자욱해 앞은 보이지 않고내 몸이 허공에 붕 떠 있는 것 같다. 몸을 가누기조차 버겁다.
비봉능선과 의상능선, 그리고 백운대와 인수봉과 만경대-세 봉우리는 안개에 유배당해 버렸다. 족두리봉 주변에 있는 기이한 생김의 바위는 오랜 세월 침식과 풍화작용으로 깎이고 파여서 마치 조각품처럼 보인다. 안내문은 이곳은 화강암 암석돔과 토어, 그르브, 나마, 산지타포니, 급애 등 보기 드문 지형경관을 지닌 자원의 보고라고 소개한다. 바람이 몰아치고 안개가 앞을 가려 겨우 사진 몇 장만 남기고 각황사로 하산한다.
내리막길은 족두리봉 후면의 철주 난간 지대를 지나 향로봉과 족두리봉, 불광공원지킴터, 탕춘대공원지킴터, 구기터널지킴터의 오거리 이정표까지 비봉능선으로 길게 이어진다. 오목한 고갯마루 오거리 이정표에서 구기터널지킴터 방향으로 내려가면 각황사가 나온다. 다른 곳으로 하산해도 되지만 안갯속에서 암릉지대를 무사히 오르게 해 주신 감사한 마음을 절간 부처님께 전하기 위해서다.
우거진 숲 속에서 풍경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따라가니 기와지붕이 언뜻 보이고 절간의 옹달샘이 먼저 반긴다. 각황사는 향로봉과 족두리봉 계곡에 있는 산속의 절간이라 한가롭기만 하다. 사찰의 삼매정수선원은 “지혜가 없는 자에게는 삼매가 없고 삼매가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라고 법구경의 깨달음을 전해준다. 경내를 둘러보고 풍경소리와 더불어 사유의 시간을 가진 뒤, 도량을 뒤로하고 수문 바위를 지나 산행 날머리 구기터널지킴터로 내려간다.
(안개에 유배 당한 족두리봉)
지킴터에서 도로를 따라 십여 분 내려가면 건널목이 나오고, 건너편에 옛성길 출입문이 보인다. 이 문을 통과하면 오르막길은 나무 데크 계단과 황톳길로 이어진다. 넓은 평상 쉼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각황사 옹달샘에서 챙겨 온 약수를 한 잔 마시고 땀도 식힌다. 길은 평탄한 황톳길에 솔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삼십여 분 오솔길을 따라가니 포방터 시장으로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오른쪽 내리막길에 널찍한 나무 데크 쉼터가 나오고 북한산 자락길과 만난다. 오늘의 안개 산행을 마무리할 겸 잠시 쉼터에서 여장을 정리하고 포방터로 간다. 포방터는 조선시대부터 포를 설치했던 곳인데, 요즘에는 포방터시장으로 더 유명하다. 그곳 보리밥집에 들러 구수한 된장과 시래기를 비벼 먹는 맛은 일품이다. 여름엔 건너편 시원한 초계 국숫집과 홍제천 정자 옆에 있는 돌솥밥집도 산친구와 자주 찾는 맛집이다. 오늘은 보리밥 시래기 된장에 막걸리 한 사발로 산행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