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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다올 Nov 22. 2024

천재시인 백석 단상

(표지: 백석 전 시집,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지난여름이었다. 통영을 여행하면서 지금도 맑은 물이 찰랑대는 명정샘에 들려보고 통제영 충렬사 계단에 앉아 ‘란(蘭)’을 기다리던 백석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얼마나 그녀가 보고 싶었으면 세 번씩이나 이곳을 찾아와 그녀를 기다렸겠는가!

나는 그런 백석의 심정으로 계단에 앉아서 구름이 흘러가는 무심한 하늘만 쳐다보았다. 하늘이 파랗다. 통영의 바다도 하늘도 나도 파랗게 물이 들었다.


   배도 출출하여 허기를 채울 겸 시장에 들렀다. 지나가는 길에 전 부치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여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린 시절 엄마가 부쳐주던 파전이 먹고 싶었다. 얼굴에 골이 패인 아주머니에게 “파전 하나하고, 막걸리요.” 주문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모자를 쓴 여행객들이 전을 먹고 있었다.


   파전을 쭉쭉 찢어서 먹었다. 전을 한입 베어 물자 쪽파 특유의 달짝지근하고 싱그러운 향이 입안에 가득 찼다. 의 맛과 향이 어우러져 입안에서 난리가 났다. 파전에 막걸리를 자작하면서 백석이 잠시 이곳에도 들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주머니에게 백석을 혹시 아느냐고 물었더니 '충렬사에 보이소!' 하고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경상도 아지매의 상투적인 말투였다.     


   백석은 그를 따르는 팬이 많았다. 그런 그가 눈이 펄펄 날리는 캄캄한 밤에 북간도 두메로 떠났다. 그것도 추운 겨울날 눈이 쏟아지는 밤에 혼자 가면 쓸쓸할 것 같아서 나타샤와 함께 떠났다. 그녀가 눈길에서 발이 푹푹 빠지지 않도록 흰 당나귀에 그녀를 태우고 산골로 도망가듯 한밤중에 떠났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시를 남기고 홀연히 떠난 천재 시인 백석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오류의 이념 잣대로 그를 멀리하던 사람들도 돌아온 그의 참모습을 알고 나서부터 모던 보이(modern boy) 백석을 사랑하게 되었다.


유달시리 눈에 잘 띄는 6척이 넘는 큰 키에 머리 모양은 멀리서 봐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독특했고, 더블 슈트(double-breasted suit)를 입고 중절모를 쓴 그를 본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옆 사람을 잠시 잊고 백석에게 한눈을 팔았을 게다.


   시인 윤동주가 존경하고 사랑한 백석이 오늘처럼 눈이 내리는 밤에 나타샤와 함께 흰 당나귀를 타고 어디선가 나타날 것만 같다. 윤동주가 얼마나 그를 좋아했으면 100부 한정판으로 출간된 백석의 시집 『사슴』을 구하러 책방으로 전전하다가 구하지 못하고, 결국 연희전문 도서관에서 하루 만에 필사하여 필사본을 늘 품에 지니고 다니며 읽었다고 한다.


그는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와 운율이 닮은 시 「별 헤는 밤」을 남겼다. 백석은 안도현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일 뿐 아니라, 한국의 시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가 젊은 시절, 그를 따르던 여성 3인방이 있었으니 소설가 최정희와 시인 노천명과 모윤숙이다. 그녀들은 늘 사슴처럼 백석을 따라다녔다. 노천명은 백석을 짝사랑해서 「사슴」 시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백석을 기다리다 못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사슴이 되었는가 보다.


   너무나 인간적인 백석, 그의 시를 읽으면 어린 시절 할머니 무릎을 베고 옛날이야기를 듣던 때가 생각났다. 그의 글은 토속적인 풍물과 방언, 그리고 향토색 짙은 어휘와 문체가 눈에 띄게 드러난다. 백석 전 시집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를 펼치면 가즈랑집 할머니가 생각나고, 여우난골이 떠오르고, 진할매가 그리워진다. 이부자리를 펴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어렴풋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백석의 나타샤가 누구인지 시중 호사가들은 입이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나타샤가 대원각 주인 자야 김영한이라니 북간도에서 만난 처자라니 하며 저잣거리의 팬심을 자극한다. 내가 생각하기엔 나타샤는 백석의 첫사랑 ‘란(蘭)’이 아니었을까, 백석이 한눈에 반한 ‘란(蘭)’은 이화 고녀생 박경련이고 그녀의 고향은 통영이다.


   백석이 그녀를 못 잊어 세 번씩이나 통영을 찾아가 만나려고 했지만 결국 만나지 못하고 그녀의 어머니에게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청혼을 넣었다. 박경련의 어머니는 친오빠인 서상호에게 백석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고, 서상호는 후배이자 백석의 친구인 신현중에게 백석에 관해 물어보았다. 친구 신현중은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넌지시 박경련의 외삼촌인 서상호에게 말했다. 그리곤 자기가 청혼하여 그녀와 혼인했다.      


   친구 신현중에게 배신당한 백석의 심정을 여기 옮긴다. 그가 남긴 시의 행간에서 그의 애통한 심정이 읽힌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서 그는 봄날 푹석한 밤에 깊은 생각에 잠겨 시를 지었다. 시의 2연만 발췌하여 그의 마음을 전한다.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샛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지금도 통영 명정샘은 맑은 물이 찰랑대고, 통제영 충렬사 계단 건너편에 있는 백석의 시비는 아직도 ‘란(蘭)’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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