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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다올 Nov 15. 2024

별서 백사실 산책

(사진: 4월의 백사실)

  

   비밀의 정원으로 가는 길에 사천(沙川)이나 보고 가야겠다. 사천에는 늘 맑은 물이 흐른다. 세계 유수 대도시 어디나 이렇게 맑은 물이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축복받은 도시 서울이다.

모래내 사천은 북악에서 발원한 물줄기와 북한산 평창계곡 물줄기가 합쳐지고, 인왕산 무계동에서 흘러 내려온 계류와 만나 시내를 이루어 흐른다. 모래내로 모여든 계류가 천의 물고기와 청둥오리를 키우고 하류에서 불광천을 만나 한강 품으로 달려간다.      


   사천 암반 위에 세워진 세검정은 팔작지붕의 정자인데, 평화를 상징하는 丁자형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한국적인 건축의 진수를 보여준다.  누군가는 정자에 올라 술상을 차려놓고 사천에 어린 달빛을 바라보며 잔을 들었으리라.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총융청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검정을 세웠다고 한다. 혹자는 연산군이 유흥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 전한다.


   사천 계류의 널찍한 반석 차일암(遮日巖) 위에 또 다른 정자가 있었는지 기둥을 세운 듯, 돌을 파서 홈통을 만든 흔적이 남아 있다. 세검정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전해오고 있으나, 《궁궐지》에 따르면 이렇다. 인조반정 때 이귀·김류 등의 반정 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고 씻었던 자리라고 해서 洗劍(세검)이라는 이름 유래되었다고 하며, 이후 정자를 지으면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조선 왕조는 실록이 완성되면 이곳 사천에서 사초의 초고를 물에 씻어 먹물을 빼는 세초(洗草)를 하였다. 세초한 종이는 재사용했다고 한다. 세검정 주변은 풍광이 뛰어나 흥선대원군의 별장 삼계동(三溪洞)과 연산군의 야외 연회장인 탕춘대(蕩春臺) 터가 있다. 인왕산 기슭에 자리한 삼계동은 세 곳의 시냇물이 모이는 계곡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탕춘대는 연산군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고 전한다.


   세검정과 탕춘대 터를 지나 총융청 터 표지석이 있는 세검정초등학교로 들어선다. 운동장엔 ‘장의사지 당간지주’가 동·서로 마주 보고 서 있다. 장의사(莊義寺)는 신라가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화랑 장춘랑과 파랑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문무왕 때 세운 사찰이다. 장의사 절터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고 당간지주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하는데, 기둥 모서리에 장식이 있고 지주의 안쪽에 둥근 구멍을 뚫어 당간을 끼우도록 하였다.      


   사천을 거슬러 신영동 마을로 접어들면 바위에 불암(佛岩) 글자가 새겨진 골목이 나오고, 일붕선교종 총무원이 보인다. 가파른 골목길 계단을 오르는데 졸졸 물소리가 들린다. 지난한 세월 물줄기는 바위 틈새에 가느다란 물꼬를 터고 물길을 만들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물꼬 틈새는 깎고 깎여서 깊은 골이 파이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거센 물길이 바위 틈새를 조금씩 넓혀서 바위틈에 도랑을 만들었다.


   이정표는 현통사와 백사실 계곡을 가리킨다. 조선의 선비들이 동령폭포라 이름 지은 2단 폭포를 지나 다리를 건너 산기슭으로 난 데크 계단으로 오른다. 건너편 사찰 현통사를 바라보는데 특이한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절간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제월당(霽月堂)의 月 자가 오른쪽으로 누워 있다. 도량에 달이 차서 기운 것인지, 스님이 물에 거꾸로 비친 달을 보고 쓴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영험한 달의 기운이 느껴진다.


   데크 계단이 끝나고 숲이 우거진 호젓한 산길로 접어들면 도롱뇽 서식지 안내문과 백사실 계곡 생태경관보전지역 지도가 보이고, 이백여 미터 위에 추사의 별서 백사실(白沙室) 터가 나온다. 별서(別墅)란 세속의 벼슬이나 당파 싸움에 야합하지 않고, 자연에 귀의하여 전원이나 산속 깊숙한 곳에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려고 지은 집이라고 한다. 지금은 누구의 소유인지는 모르나, 문화재는 복원이 안 된 채 그대로다.


   추사가 백사실 사랑채에서 차를 마시며 연못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름 상상해 본다. 사랑채에서 보이는 연못엔 고마리가 흰색 저고리에 붉은빛 꽃띠를 두르고 연못을 온통 물감으로 칠했는데, 끄트머리에 매달린 씨앗이 메밀을 닮았다. 옛날 먹을 것이 귀했을 때 시골에선 고마리의 연한 잎과 줄기를 삶아 나물이나 된장국으로 끓여 먹기도 했다.


   연못엔 육각 정자를 떠받쳤던 장초석이 연못 안에 두 개, 연못 바깥에 네 개가 비스듬히 서 있다.

그 주변엔 오래 묵은 돌 탁자와 화강암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어 추사를 만나러 온 나그네들이 쉬면서 를 마시기에 좋다.

연못을 둘러보고 별서 백사실 터에 올라선다. 백사실을 둘러보니 안채는 보존을 위해 주초석을 흙으로 덮어 놓아 볼 수가 없다.


   사랑채 초석에 걸터앉아 건너편 산 중턱의 月巖(월암) 각자를 바라본다. 굽이굽이 흘러 백악 계곡을 따라 산등성이를 넘어서 휘영청 보름달이 뜨면, 오늘 밤 나그네는 사랑채 툇마루에 걸터앉아 반달 월암을 바라보며 막걸리 한 사발에 시 한 수를 읊었으리라. 월암 각자(刻字)는 달빛에 더욱 도드라지게 보일 테고, 달그림자가 월암을 덮으면 나그네의 심정은 더욱 애절하였으리라.     


   백사실 앞마당에서 말랑말랑한 흙길을 따라 올라가면 이정표는 백석동천과 능금마을을 가리킨다. 소나무가 우거진 백석동천 길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白石洞天(백석동천) 각자가 보이고, 안내문에 백석은 백악, 즉 북악을 말하고,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라고 적혀 있다. 백석동천 주변 노송들을 보면, 족히 이삼백 년은 넘었을 성싶어 새삼 예스러움을 느낀다.


   조선의 선비들이 말하기를 북악에 백석동천이 있고 인왕에 청계동천이 있다고 했는데, 청계동천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길이 없고 백석동천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오십여 미터쯤 위쪽에 조선 중기 때부터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를 심었던 별천지 능금마을이 나온다. 개울에는 도롱뇽과 가재, 북방산 개구리 등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는 ‘백사실 계곡 생태경관보전지역’ 안내문이 서 있다.


   개울가 너럭바위에 여남은 개의 통나무 의자가 놓여 있고, 외나무다리는 개울을 가로질러 나그네를 맞이하는데, 능금마을과 숲과 다리가 한 폭의 풍경화처럼 내게로 다가온다. 능금마을에서 내려오는 길에 숲 속에서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가 들린다. 한참 두리번거리며 찾다가 끝내 찾지 못하여 못내 아쉬웠다. 갈증을 해소할 겸 백사실 터 왼쪽 뒤로 난 길을 따라 이백여 미터를 올라가서 백사실 약수터에서 물 한 잔을 마신다.


   백사실 터로 내려와 오늘의 인문학 산책을 마무리하면서 허기진 배를 채울 겸 종종 들리는 구기동 두부전문식당에 가서 순두부 젓국에 막걸리 한잔한다. 날머리를 부암동으로 해서 환기 미술관에 들러 그림을 감상하는 것도 좋다. 막걸리 한 사발을 앞에 놓고 친구와 함께 조선의 시인 묵객들이 칭송했던 백석동천과 추사의 백사실과 월암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 편의 스토리텔링을 엮는다. 이왕 말 나온 김에 보름달이 뜨는 날 백사실 월암을 보러 한번 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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