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에 들어서면 언제나 헤이즐넛 향이 그윽했다. 그 향이 참 좋았다. 그때부터 나는 그 집에서 헤이즐넛 향을 즐기면서 일과 사랑과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일밖에 몰랐던 그 시절, 일 중독으로 일터에서 살다시피 했던 내가 주말마다 찾은 작은 그 집은, 지친 마음의 휴식처이자 재충전을 위한 쉼터였다.
해를 넘기면서 장기 출장을 다니던 그때, 매주 토요일이면 본사로 출근하여 오전엔 경영진과 프로젝트 미팅을 하고, 오후엔 팀원들과 늦게까지 아이디어 공유 회의를 가졌다. 늦은 오후에 우리는 각자의 케렌시아(Querencia)로 뿔뿔이 흩어졌다. 어떤 사람은 집으로, 어떤 사람은 친구를 만나러 커피숍으로, 또 어떤 사람은 오페라 극장으로, 그리고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반지하 클래식 라운지 바(bar)였다. 계단참에 내려서면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부드러운 헤이즐넛 향이 폐부 깊숙이 밀려왔다. 바(bar)는 색소폰과 기타 반주와 헤이즐넛 향기로 가득하고, 천장에 매달린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반사된 간접 조명등 불빛은 어느 저택의 초저녁 거실처럼 라운지에 옅게 스며들었다.
바(bar)에 들어서자 나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수트 저고리를 벗어 스탠드 옷걸이에 걸어놓고 늘 앉던 바텐더 테이블에 앉아 몰트 위스키 잔술을 주문했다. 바텐더는 돌아가면서 근무하기 때문에 요일마다 얼굴이 바뀌었다. 어떤 날은 단골 바텐더가, 또 어떤 날은 낯선 바텐더가 내 이야기 친구가 되어주었다.
몰트 위스키를 마시면 짜릿한 기운이 금세 전신으로 퍼졌다. 일주일 동안 나를 옭아매고 옥죄었던 일에서 벗어나자,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느슨해지면서 몸이 나른해졌다. 피로가 파도처럼 몰려오고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았다. 술기운과 함께 재즈 선율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와 전신으로 흐르고, 헤이즐넛 향은 얼굴과 목을 감쌌다.
영화 카사블랑카 OST가 들렸다. 릭과 일사(Rick and Ilsa)가 즐겨 듣던 그 노래 "As time goes by."가 연주되고 있었다. 샴페인 잔을 들어 연인 일사에게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 Here`s looking at you, kid!"라고 멋진 건배사를 하던 센티멘털리스트 험프리 보가트(Humphrey Bogart), 릭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에서 옛 연인 릭을 바라보던 영원한 카사블랑카의 연인 잉그리드 버그먼(Ingrid Bergman), 일사의 모습도 떠오르고, 자유의 나라로 탈출하는 마지막 비행기 티켓을 그녀에게 건네던 릭의 마음도 헤아렸다.
바텐더에게 언더락 글라스에 아메리카노 한 잔을 부탁했다. 안갯속에서 일사가 탄 비행기가 이륙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언더락 위스키를 마시듯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셨다. 아메리카노는 고소하면서도 부드러운 풍미와 더불어 깊고 풍부한 아로마 향이 느껴졌다. 처음엔 에스프레소를 자주 마시다가 따뜻한 물에 희석하여 마시는 것도 좋아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시기 시작했다.
그날 작은 그 집에서 잔술을 나눌 친구도 없어 바텐더와 일과 사랑, 그리고 재즈와 술과 커피에 관한 이야기를 마구 뒤섞어 나누다 저녁이 늦어버렸다. 근처에 사는 친구를 불러 밀린 얘기나 좀 해야겠다 싶어 계산을 치르고 여전히 헤이즐넛 향 그윽한 그곳을 빠져나왔다.
자주 들리던 평창동 카페에 도착하니 친구가 먼저 나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앞에 놓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 악수와 격한 포옹을 했다. 헤이즐넛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그 바(bar)를 알고 나서부터 나는 어디든 카페에 가면 언제나 헤이즐넛 커피를 마셨다.
이곳에서도 재즈 음악이 흐른다. 아메리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유럽 음악과 고향의 민요를 섞어서 불렀다는 얘긴 어디에선가 들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선율이 애잔했다. 여기에 어울리는 커피가 부드러우면서도 약간 달달한 헤이즐넛 커피였다. 커피 향이 목구멍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을 돌아 코 끝으로 그윽한 향을 싣고 왔다.
밤이 깊어가고 카페 문 닫을 시간이란다. 내 몸에서 커피 냄새가 났다. 친구와 악수를 나누고 카페를 나왔다. 몰트 위스키와 헤이즐넛 향과 커피에 취해 밤거리를 걷는데, 어디선가 색소폰 소리가 들려왔다. 재즈 선율을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택시를 타고 나의 보금자리 케렌시아로 가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