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글을 써야 할 시간이다. 기억이 무뎌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야 할 거리가 아직 나에겐 남아 있다. 산으로 인문학 탑사를 다니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전부터 나는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을 꾸고 있었다. 캐나다에 살면서 버킷리스트와 유사한 과제를 아카데믹 에세이로 쓴 적이 있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 무슨 일을 하면서 살 것인지, 자신에게 묻고 답하는 설문도 작성해 보고 자료도 조사하였다. 그 설문과 조사 결과를 토대로 소논문과 유사한 에세이를 작성하여 과제로 제출했다. 교수의 극찬도 받았지만, 나에겐 희망 사항이자 묵직한 짐으로 다가왔다.
조사 결과만 요약하면 이렇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모두 나열하여 각각 점수를 매기고, 그중에서 점수가 높은 스무 개를 선정해서, 내가 얼마나 그 일을 좋아하는지 다시 점수를 매겼다. 그중 점수가 높은 여남은 가지를 선정하고, 내가 그 일을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 또다시 점수를 매겼다. 최종적으로 점수가 높은 네 가지를 선정했다.
첫째는 전문 경영컨설턴트, 둘째는 작가, 셋째는 NGO 활동가, 넷째는 캐나다 이민자들을 도와주는 변호사였다. 넷째인 변호사는 귀국하면서 의미가 없어졌고, 첫째는 이미 실현했고, 남은 건 둘째와 셋째다. 두 번째 희망인 등단 작가가 되고 나면, 세 번째 NGO 활동가로 돌아갈 생각이다. 네이버 카페 「희망선 걷기」를 NGO 사단법인으로 등록하여 운영위원들과 함께 사회활동을 해보고 싶다. 물론 글도 짬짬이 쓰면서 활동할 것이다.
지금은 창작에 집중해야 할 시간이다. 늦은 밤에 막걸리 한 잔을 옆에 놓고 글 한 단락 쓰고 한 모금 마시고, 또 한 단락 쓰고 막걸리를 마신다. 습작 노트에 한 줄 한 줄 글이 이어지고, 종이 한쪽이 빼곡히 채워지면 막걸리는 반 병이나 달아나고 없었다. 머리가 무겁고 어깨가 뻐근하다. 뒤돌아보니 냉장고 위에 놓여 있는 탁상시계 작은 바늘이 숫자 1을 넘겼다.
오늘 쓸 양은 채워야지 생각하면서 가볍게 몸을 풀고, 다시 작업실 책상 앞에 앉아 펜을 잡고 글을 써 내려간다. 사람들은 흔히, 상대방이 말을 보태어 마음에 들지 않는 얘기를 하거나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소설 쓰고 있네”하고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곤 한다. 그런 소설 한 번이라도 써 보고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내가 처음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은 건 지난봄이었다. 기승전결 핵심 내용과 전체 뼈대는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여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제목부터 정했다, 『아비의 귀환』.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일제 치하의 경험과 전쟁 이야기를 밥 먹듯이 했고, 어린 나의 눈으로 본 농촌의 실상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한 많은 세상을 살고 가셨던 아버지 산소에 바치고 싶었다.
글이 잘 써지는 날에는 원고지 백 매까지 썼고,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는 여남은 매밖에 못 썼다. 그렇게 초고를 쓰고 퇴고를 거듭하여 아내에게 보여주고, 문학상에 도전했다.
전라도를 대표하는 작가 최명희의 혼불, 교보생명과 교보문고 창립자 신용호 회장의 대산, 그리고 연세대 문과대학에서 주관하는 문학상에 작품을 보냈다. 모두 떨어졌다. ‘그래! 작품 하나밖에 안 뽑는데, 내가 무슨 천재도 아니고 문예창작과 전공자도 아닌데 될 리가 없지.’라고 자조 섞인 변명과 위안거리를 찾았다.
경영컨설턴트로서 몸에 밴 습관, 「Plan-Do-See, Monitoring and Feed-back」을 해보았다. 플롯이 문제였다. 시놉시스에 플롯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으니, 어느 심사위원이 나의 시놉시스를 읽어보고 나서 내 작품을 읽어보고 싶겠는가.
도대체 플롯이 무엇이길래 이리 사람 속을 태우는지, 플롯 파헤치기에 집중했다. 플롯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서 『아비의 귀환』 퇴고를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썼다. 내년에 다시 이 책을 보면 또 뜯어고칠 게 내 눈에 보일 게다.
신작 『아버지와 아빠』는 플롯을 먼저 쓰고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번엔 신춘문예에도 글을 출품할 생각이다. 신춘문예는 대부분 신문사에서 주관하고, 내년도 신춘문예 작품 응모는 올해 12월이 가기 전에 거의 마감한다.
시간이 없다. 다시 작업실 책상 앞에 앉아 글쓰기에 매달려야 한다. 이번엔 단편소설 두 편과 장편소설 『아버지와 아빠』를 쓴다. 신작 모두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르다. 소재도 다르고, 역사적인 배경도 과거와 현재를 다루기에 다르고, 주제도 철학적인 바탕도 완전히 다르다.
늦깎이로 시작한 창작 활동이 언제 결실을 볼지 모르겠지만, 나는 매일 목표를 새긴다. 내가 이 세상을 등지기 전에 장편소설 10권을 남기고 싶다. 1년에 소설책 두 권도 좋고, 아니면 1권도 괜찮을 성싶다. 단편소설은 여러 편을 묶어 단편집으로 내면 된다. 그동안 써온 에세이도 퇴고해서 책방에 얼굴을 내밀고 싶다.
등단하고 나면 「희망선 걷기」 NGO 활동을 재개할 생각이다. 틈틈이 습작 노트에 기록하면서 다음 작품도 구상할 것이다. 당분간 반올림 동아리 모임에도 소홀할 것 같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를 바란다. 내 마음의 고향은 작가이니까.
(표지: 백석 전 시집,『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