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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석규 Jun 03. 2021

천직(vocation)의 역사적 변화와 재인식

천직(Vocation)의 역사적 변화와 재인식
From career to calling
a depth psychology guide to soul -making work in darkening times
오늘날 천직(vocation) 또는 흔히 말하는 직업이라는 단어는 통상(무역) 또는 블루칼라 업무를 위한 기술훈련과 일반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천직의 어원에 깃든 훨씬 더 깊은 뜻은 영적 또는 영혼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천직(vocation)은 라틴어의 ‘vocatio’라는 어휘에서 비롯되거나, calling, voice의 의미로 표현된다. 천직은 흥미로운 개념이고, 다소 과장된 용어인데 이를 연구한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강한 흥미가 있었던 어휘이고 풀어야 할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다.
수세기 동안 천직의 개념은 많은 중요한 변천과 의미의 반전을 겪어왔다. 전통적으로 보면 천직(vocation)은 종교적인 소명으로 묘사되어 왔다.
천직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종교적인 직업을 향해 신의 인도나 부름을 받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영적인 본성의 어떤 특별한 기능을 발휘하거나, 삶에서 어떤 특별한 일을 수행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중세 서양에서는 어떤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기도와 명상, 수도원의 봉사를 위해 생산적인 활동의 세계로 부름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라나 16세기 마틴 루터(Martin Luther), 존 칼빈(John Calvin)과 같은 개신교의 개혁자들은 중세 수도원 천직(calling)의 우월성에 대해 도전하였다. 그들은 세속적인 직업(간호사, 방앗간 주인, 석공 일을 하는 사람 등)도 영적인 의미도 지닐 수 있고, 신의 섭리로 여겨질 있다고 제안하였다.
그래서 매일 일하는 것은 신이 주신 천직(vocation)으로 생각하는 개신교의 직업윤리가 되었다.
그러나 1930년에 이르러서는 독일의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에 의해 자본주의 경제 합리성의 팽배로 개신교의 이상적인 천직은 심각하게 비판을 받고 있었다. 막스 베버는 천직이나 소명의 개념이 본래의 정신적인 맥락으로부터 분리되어 현대의 산업사회의 직업구조와 경제성장의 요구에 연결된다고 보았다.
오늘날 우리는 ‘직업교육(vocational education)’이라는 용어의 사용에서 볼 수 있듯이 특별한 직업과 산업에서 훈련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오늘날 천직이라는 용어는 신자유주 경제체제의 산업의 패러다임으로 인해 징집되었기 때문에 천직의 영적 및 영혼적 뿌리는 거의 잊혀졌다.
그러나 직업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다른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토마스 만(Thomas Mann)과 조지 엘리엇(George Eliot)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듯이 빅토리아 시대 동안 소명(calling)은 특정한 작품, 예술, 사회발전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으로 종교적이거나 영적 자극으로부터 내적 확신으로 더 나아갔다. 천직(Vocation)은 자기표현, 개인적 진정성, 성취의 한 형태로써 세상에서 자신의 일을 통해 아름답고, 창조적이며, 예술적이며, 유용하고, 의미 있는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사람들이 정당하게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일을 통해 자기를 계발하게 된다.
요약하자면 천직(Vocation)의 개념은 수세기 동안 많은 중요한 변화와 반전을 겪어왔다.
천직 전문가 제인도순(Jane Dawson)은 천직이라는 개념은 처음에는 생산적이고 경제적인 영역에서 시작되어, 나중에는 정신적 영역의 개념으로 진화되었다가 도덕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였다. 아무튼 천직 탐구는 많은 사람들에게 세속적인 관심사가 되었고 자아실현의 한 부분이기도 하였다. 비록 여전히 일부 사람들이 천직으로 종교적 믿음으로 소명을 추구할지 모르지만 심리학의 연구에서는 종교적 신념이 소명을 갖는 데 있어 필수적이거나 충분조건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막스 베버(Max Weber)의 쓴소리를 들어 보면 ‘죽은 종교적 신념의 유령처럼 자신의 소명을 자신의 삶 속에서 어슬렁거린다’라고 이야기한다.
초월적, 영적, 영혼적 차원을 갖는다는 천직 의식이 있는데 그 차원은 자신의 자아나 개인적인 의지가 전적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최근 해외사례에서는 천직이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재정의하고 있다.
개성이라는 것이 당신의 의도했던 자신의 어떤 것들이 되는 과정이라는 것에 천직 갖는 경험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천직이나 소명을 갖는다는 의식이 인류의 보편적인 드라마에서 자신의 현재 상황과 위치를 좀 더 잘 이해하는 것들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확대된 천직 의식을 갖고 있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그들의 일(work), 진로(career), 그리고 천직(vocation)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사실이다.
천직(vocation)이 반드시 재정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소명을 인생이라는 행렬에 놓고 통합해 나가기 위한 인내, 적용, 인내의 긴 과정을 포함할 수 있다. 일을 끼워 맞는 것이거나 종교적 믿음으로만 본다면 천직은 우리에게 혼란을 줄 것이다. 천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내가 사랑하는 그 자체이다. 따라서 천직 의식은 끊임없는 과정에서 일을 통합해 나가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어려서부터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소명이고 천직이라는 한 주인공이 있다. 그는 화를 제작하는 것은 자신의 큰 꿈이자 신이 주신 천직으로 여겨 성장기를 거치면서 성인이 된다. 성인이 된 주인공은 보험을 판매하는 일을 하게 된다. 몇 년 동안 일을 하면서 글을 쓰거나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적한 고향으로 내려간 주인공은 글을 쓰기 시작했고 출판사로부터 좋은 피드백을 받게 된다. 비록 영화 제작 일을 하지 못했지만 주인공이 깨달은 것은 직업적 환상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소명을 갖게 되었다.
비록 소명을 갖는 과정에서 약간의 희생이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보면 소명이라는 것은 정신의 통합, 상처 치유, 그리고 더 완전한 것이 되는 더 큰 과정 혹은 개선의 과정을 지지하는 자신의 변화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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