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커리어) 일 할게요. 무급으로

by 깊은바다 상어유영

25년 2월 초 아이가 어린이집에 간지 1년이 되어갈 때였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책을 챙겨 사거리 스타벅스로 향했다.

그곳 2층에는 노트북을 들고 일하러 오는 젊은 직장인들이 많았다.


모든 게 시작되는 봄, 찬란한 햇살.

문득 내가 할만한 일자리가 있을지 궁금했다.

'평일 오전 파트타임이라면 좋을텐데.' 하면서.

집에서 가깝고 토요일 하루 오전만 일하는 자리가 눈에 띄었다.

간단한 이력과 자기소개를 문자메시지로 보내라고 되어 있었다.

먼저 남편에게 연락해서 토요일에 일하러 나가면 아이를 봐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뜬금없는 내 노동시장 복귀 선언에 왜? 하던 남편은 토요일 오전만 혼자 아이를 보면 된다는 말에 그러라고 했다.


공고란에 나온 번호를 외우고 문자란에 입력했다.

소개팅 이후 연락 없는 남자에게 먼저 연락할 때만큼 긴장됐다.


안녕하세요.

채용공고 보고 연락드립니다.

저는 만 46세이고(PP년 ㅇㅇ졸업), OO근무 3개월(공직 13년 후 퇴직), ㅁㅁ근처 거주 중입니다.


써놓고 보낼지 말지 한참 고민하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용기를 냈다.

종이비행기 모양 송신버튼을 누르고 나서 긴 숨을 내쉬었다.


계속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연락이 안 온다.

이 정도 지나고 답이 없으면 이건 읽씹인데...

오랜만에 느끼는 쓰라림.

약간 부끄럽고 당혹스러웠다.

잠깐이라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는 것이 쉽지 않구나.

남편한테 답이 없다고 톡을 보내놓고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었다.

회신은 오후가 돼서야 왔다.


OO님 저희 토요일 마감해 주실 분을 구해서 경력이 좀 있으신 분을 찾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늙은 초짜의 연락에 사장도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을 수도 있다.

첫 번째 구인에 뺀찌를 먹은 나는 약간 상처받았지만 이대로 멈추면 다시 시작하지 못할 것 같았다.

더 늙기 전에 더 심한 뺀찌를 맞기 전에 복귀해야겠다 싶었다.

그날부터 틈날 때마다 구인사이트를 수시로 들어갔다.


사실 내가 아무런 경력 없이 노동시장에 진입할 만큼 무모하지는 않다.

아이 낳기 전 대학동기가 운영하는 동종업체에서 석 달간 트레이닝을 거쳤다.

그곳 직원들은 사장빽으로 갑자기 날아들어온 나를 어색해했지만 직장 생활 짬밥 11년은 헛되지 않았다.

커피, 쿠키 사가고 사과도 깎아 놓아 가며 농담과 적절한 칭찬으로 어색함을 누그러뜨렸다.

석 달의 경험이 있긴 하지만 그게 벌써 3년 전이다.

그 짧은 경험이 아직 내 세포에 남아있을 리 만무하다.

요즘은 좀 전에 뭐 할지 생각하다가도 까먹기 일쑤니까.


그러다 집 근처에서 공고가 나왔다.

같은 토요일 오전 근무다.

두 번째라 문자는 쉽게 썼다.

회신은 빨리 왔다. 그것도 전화로.

속으로 엄청 떨었지만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정식 출근은 3월 22일인데 한주 먼저 15일에 나올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15일에 뵙자 하고 전화를 끊었다.

역시 하늘은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사장과 전화를 끊자마자 남편한테 전화해서 자랑스러운 통보를 했다.

"나 취직했어."


출근을 일주일 앞두고 미리 가서 경험해 봐도 되는지 여쭤봤다.

3월 8일(토) 떨리는 마음으로 찾아가 사장님 및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일할 곳을 안내받고 미리 보고 오면 좋을 자료들을 받았다.

잠시지만 가운을 입고 다른 분들이 일하는 옆에서 지켜보고 몇 번 시범적으로 해봤다.

조금 더 해야 할 것 같아 평일에 나가도 되는지 허락을 구했더니 흔쾌히 나오라고 했다.

수영을 마치고 화, 목 두 시간씩 나갔다.

나가기 전날은 받아온 자료를 식탁에 펴놓고 읽고 말하는 걸 연습했다.

화, 목 평일은 점심시간 직후라 손님이 많지 않았고 평소대로 돌아가는 데 끼어들기도 그래서 분위기만 봤다.


3월 15일이 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30분 일찍 도착했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들어갔다.


9시가 되니 손님이 하나 둘 들어왔다.

갑자기 실전이다.

순서가 되면 손님을 호명해서 설명하고 물건을 전달해야 한다.

전문적이지만 자연스럽게 미소지으며 말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마스크 너머로 내 목소리가 겨우 빠져나온다.

온몸이 경직되다 못해 어깨가 말려들기 시작한다.

자신감은 저 멀리 1킬로 밖으로 달아났다.

나도 모르게 카운터에서 멀찍이 서게 된다.


그 모습을 사장은 유심히 보고 있었다.

손님으로부터 돌발 질문이 나오면 사장이 옆에 와서 도와주고 손님이 없을 때 이리저리 코치를 했다.

하지만 이미 당황한 나의 눈은 멀었고 귀는 닫혔다.

시계를 연신 봤다.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싶었다.


그렇게 퇴근시간이 됐고 사장이 잠깐 보잔다.

조용한 곳에서 대면한 사장은 내가 생각보다 너무 서투르고 금방 좋아지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토요일은 근무자가 평일보다 1명 줄기 때문에 업무 로딩이 큰데 다른 직원들에게 부담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이대로라면 다른 사람을 찾아야 된다는 말까지 들었다.

일단 22일은 기존 직원들로 대체하고 생각을 좀 해보잔다.

나의 채용이 기로에 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여기서 밀려나면 나는 영영 복귀를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돈을 벌기보다 노동 시장에 복귀를 하는 게 중요한데 굳이 돈 받고 일할 자리를 고집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사장에게 역으로 제안을 했다.

월, 화, 수, 목 오전 2~3시간 일을 배우러 나가도 되겠느냐고.

급여는 없이 말이다.

톡을 보내놓고 이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면 나의 노동시장 복귀는 물 건너간 거라고 포기하려고 했다.


3시간 지나서 답이 왔다.


넵. 가능합니다.

짧게 한 달, 길게 두 달 잡고 함께 해봐요.

토요일 정식 근무는 다른 분들께 교대 근무 부탁했습니다.

지금 준비 중인 강의가 있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함께 해봅시다. ^^


따뜻한 어조였다.

너무나 감사했다.


무급이면 어때.

배우다 보면 익숙해지고 그러다 보면 돈 받으며 일하는 날도 오겠지.

아직 세상은 그리 각박하진 않구나.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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