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전날 밤부터 내일 해야 할 일과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한다.
일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이다.
그래서 일이 힘들든 수월하든 짧든 길든 출근은 그 자체로 힘든 것이다.
돈을 받지 않는다고 대충 일 하는 건 아니기에 퇴근 후 아이를 하원시키면 피곤이 밀려온다.
그래도 첫 한 달은 그날 배운 것들을 노트에 적어와 이해 안 되는 부분을 추가로 찾아 정리했다.
모르던 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도 재밌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가는 나 자신이 대견했다.
대신 운동, 집안일, 독서, 관심사 유튜브 찾기는 어느 정도 포기해야 했다.
한 달쯤 지나니 일은 조금 익숙해졌지만 아이를 재우고 하는 공부는 너무 힘들었다.
두 달이 되어서 공부는 멈췄고 무급으로 일하는 내 존재가 애매하게 느껴졌다.
내가 필요해 자청한 무급이지만 더 잘하고 싶게 만드는 동력이 없었다.
그 동력은 바로 돈이었다.
일터에서 내 존재의 필요성과 유능감의 척도는 급여.
공무원도 직급과 호봉에 따라 월급은 정해지지만 매년 성과평가가 있다.
상위등급을 받는 건 성과급 금액 차이도 있지만 내 유능함을 인정받는 것이기에 기쁨이 훨씬 크다.
대가 없는 노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이미 13년이나 급여를 받으며 일했던 노동자가 아니던가.
순수한 학생처럼 배움의 열정을 페이와 바꾸기에 너무 오랫동안 급여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때부터 다시 구인 공고를 찾았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일요일 오전 파트타임 공고가 떴다.
남편에게 아이를 잠깐 맡기고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자로 연락을 했고 면접 날 근처 카페에서 사장님을 만났다.
비 오는 노동절 오전이었다.
카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카페 가운데 유일하게 비어있는 조그만 테이블에서 마주 앉은 사장님은 나보다 8살이나 어렸다.
분위기도 질문도 사람도 부담스럽지 않았기에 술술 얘기가 나왔다.
전혀 다른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했기에 퇴직 후 대학 동기가 하는 사업장에서 석 달간 교육을 받았고 아이 낳고 공백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곳에서 2개월째 일 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기에 이 일이 내게 그리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고 살짝 어필했다.
이곳은 소아과 처방전이 주인 약국이다.
나는 오래전에 약사 면허를 취득했지만 그냥 서류로만 갖고 있을 뿐이었다.
일요일 일자리라 지원자가 없었는지 아니면 내 어필이 통했는지 그 자리에서 바로 채용됐다.
출근은 3주 후였다.
출근 첫날.
오전 5시 30분 저절로 눈이 떠졌다.
고요히 자고 있는 남편과 아이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섰다.
연노랑 빛으로 쏟아져 내리는 5월의 아침 햇살과 여기저기 몰려다니는 공기가 뚜렷하게 느껴질 만큼 거리는 한산했다.
면접을 봤던 그 카페에 삼십 분 일찍 도착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출근 전 카페인 충전을 위해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가루약과 시럽이 주로 조제되는 소아과 아래 약국은 약사들 사이에서 3D로 통하는 곳이다.
내 체력이 감당 못할 정도로 힘들면 어떡하지?
너무 못한다며 하루 만에 쫓겨나는 건 아닐까?
늙은 초짜와 일 못하겠다고 동료들이 비난하면 어쩌나?
온갖 걱정이 앞선다.
커피를 마시며 옆을 돌아보는데 약국 간판에 불이 들어왔다.
누군가 출근했다.
8시 50분에 맞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늘 처음인 일요일 파트타임 약사라며 나를 소개하고 조제실로 들어갔다.
곧 사장님(국장님)도 출근했다.
가운을 꺼내 입고 슬리퍼도 신었다.
오늘의 전쟁에서 나를 도와줄 무기는 다 장착했다.
곧이어 다른 약사님이 오셨고 바로 조제가 시작됐다.
9시가 되자마자 처방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국장님은 약의 위치, 각종 기구 사용법, 라벨 붙이는 법등을 설명하고 바로 조제를 해보라고 했다.
연습 없이 바로 실전이다.
소아과 처방전은 알약의 단위가 소수점인 경우가 많다.
0.16667알, 도대체 이게 몇 알일까 당황하고 있으니 옆에서 몇 알이라고 알려준다.
시키는 대로 약을 넣고 믹서에 간다.
약이 갈리는지 내 멘털이 갈리는지 모르겠다.
믹서기 뚜껑을 열자 약 가루가 훅 날린다.
이 가루 속에 내 영혼도 날아가는 것 같다.
약 분포기에 갈려진 믹서기 속 가루를 넣고 칼이라고 부르는 기구로 평평하게 만든 다음 가루약 전용 포장지를 꽂고 가루를 떨어뜨린다.
그런 다음 열선을 올려 포장을 봉한다.
가루가 고르게 분포 됐는지 이물질은 없는지 검수하고 봉투에 넣는다.
나머지 시럽과 패치 등을 챙겨 바구니에 넣으면 처방전 대로 약이 조제됐는지 한번 더 확인하고 투약구로 내보낸다.
타 타탁.
위위윙.
찍찍.
붕.
각종 기구 소리가 끊임없는 약국 조제실은 최적의 동선과 효율적 공간 활용의 집약체다.
수 백가지 약품은 기준에 따라 배치되어 있고 선입선출을 기준으로 부족하기 전에 주문해서 채워야 한다.
필요한 물건은 일하는 사람의 눈높이와 움직임에 맞게 자리를 잡고 있다.
칼, 가위, 펜 같은 도구들은 여기저기 굴러다니지 않도록 손이 닿는 위치에 자석으로 붙여놨고 시럽 병 뚜껑은 헷갈리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약장 앞면에 찍찍이로 붙여놨다.
두 발을 움직이지 않아도 모든 걸 할 수 있게끔 필요한 것들이 딱 그 자리에 있었다.
처리해야 할 처방전이 쌓이자 나에게 나오라고 하더니 국장이 직접 나섰다.
그는 마치 피아니스트처럼 손을 쓰윽 올리더니 약을 믹서에 넣어 돌리고 탁탁 치더니 어느새 분포기에 넣고 분포를 끝냈다.
조제가 완료된 가루약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4개씩 끼우면서 순식간에 분포된 양을 검수하는 손과 몸의 움직임이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 작업에 최적화된 자기만의 리듬과 감각이 보는 내게도 전해졌다.
조제실 두 사람이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한 사람처럼 손발이 척척 맞았다.
노동이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감탄하며 지켜봤다.
얼마나 하면 그렇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국장은 금방 된다며 쑥스러워했다.
프로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원하는 결과물을 낼 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몸에 그 기술과 지식이 체화되어 누구도 뺏을 수 없는 사람.
아마추어인 내 눈엔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다.
몸이 갈리고 멘털이 몇 차례 홀연히 날아가다 보면 나도 프로가 되어 있을 것이라 희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