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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Jul 19. 2024

거듭되는 오해 그리고 빅크런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



보이는 것만을


세 개의 시간이 있다. 학교 선생에게 학대당하는 아들이 그저 걱정되는 한 엄마의 시간이 있다. 한 아이가 다른 한 아이를 괴롭히는 것이 걱정되는 한 선생의 시간이 있다. 좋아하면 안 될 아이를 좋아하게 된 것이 걱정되는 다정하고 정의로운 한 아이의 시간이 있다. 세 개의 시간은 같은 사건 속에서 공존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들 세 시간은 닮아있지 않다. 완전히 별개의 사건을 다룬 것마냥 서로 독립적으로 인식되고 독립적으로 판단된다. 그렇게 오해가 불거지고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며 각자의 시간을 인식한다. 우리는 각자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각자의 시각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시간 속에서 각자의 시각만으로 다른 시간을 지나온 상대를 판단한다.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시각이 놓쳐버리고만 어떤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배제한 채 그렇게 사실을, 다른 이의 진심을 함부로 난도질한다.


영화가 끝나면 숨겨져 있던 시간의 존재를 하나 더 느낄 수 있다. 관객인 나의 시간. 엄마의 시간을 따라가며 아이를 학대해 놓고도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듯한 선생을 비난했다. 선생의 시간을 따라갈 땐 자기 아들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모른 채 무조건 아이를 두둔하고 나서는 학부모(아이의 엄마)와 끊임없이 거짓을 말하는 아이를 비난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었던 아이의 시간에 다다랐을 땐 나를 비난했다. 모든 걸 보지도 못했으면서 무작정 선생을 비난했고, 모든 걸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무작정 학부모와 아이를 비난했다. 지나온 시간과 지나온 시각들이 한데 어우러지고 나니 상대가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상대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진실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일말의 노력도 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보이는 것만 보고 막무가내로 분노했던 몇 분 전의 과거가 아른거린다. 연이은 시간을 마주하며 지금 보고 있는 시간과 이전의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모순점에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평범한 것만을


평범함을 가지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여기 이 영화 안엔 평범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바람을 피우다 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린 남편 대신 홀로 아이를 키워내고 있는, 그래서 예민한 학부모로 오해받게 되는 싱글맘, 웃는 모습이 섬뜩하고 취미는 고약하며 술집 여자를 사랑하는 초등학교 선생, 실수로 손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교장선생, 폭력을 일삼는 싱글대디와 남자를 좋아하는 그의 아들. 그런 남자아이를 좋아하게 된 또 다른 남자아이. 여느 가족들처럼 평범한 모습을 띨 수 없게 된 이들, 평범함이 주는 온전함의 선에서 벗어나 지옥에 떨어져 버린 이들.


더 이상 평범하지 못하게 된 이들은 그 평범치 못함으로부터 비롯된 불행의 굴레에 끌려다닌다. 싱글맘은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가족'을 가졌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아들에게 건넸고 남자아이를 좋아하게 된, 더 이상 남들이 말하는 평범함의 범주에 들지 못하게 된 그녀의 아들은 그녀의 작디작은 소망 앞에 더욱 괴로워하게 된다. 인상이 좋지 않으며 술집 여자를 사랑하는 초등학교 선생은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았어도 저절로 잘못이 생긴다. 학생들을 소중히 대했음에도, 아이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했음에도 그는 인상이 좋지 못하며 술집 여자를 사랑하기에 그가 간절히 외치는 진실은 그 누구도 듣지 못한다. 오랜 세월을 학교에 다 바친 책임감 넘치는 교장선생은 한 번의 실수로 마음을 잃는다. 너무 오랜 시간을 학교에서 지내온 탓에 이젠 학교 그 자체로 굳어져 버린 그녀는 소중한 손녀를 제 손으로 보내버린 데서 오는 죄책감 앞에서 정직할 수 없었다. 남편을 앞세워 학교를 지킨 선택 덕분에 그녀는 더욱 불행해졌다. 불행을 조금씩 다른 이들에게 흘려보냄으로써 얻는 작은 위안만이 그녀를 이 괴로움 속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게 한다.


자신이 손으로 자기 삶을 불행하게 만들어놓고 이를 아들의 탓으로 돌려버린 싱글대디는 아이에게 돼지의 뇌를 심는다. 아이는 불행에 찌든, 평범하지 못한 아버지로 인해 사람이 아닌 괴물이 되어버렸다. 아이는 아버지의 말에 사로잡혀 평범함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사람인 친구들은 괴물을 향해 선을 긋는다. 아이는 점점 더 평범하지 못한, 평범한 여느 아이들과는 어울릴 수 없는 괴물이 되어간다. 그리고 이 평범하지 못한 아이를 좋아하게 된, 예전엔 평범했지만 이젠 평범함의 선에서 벗어난 남자아이. 아이는 이제 더 이상 평범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린 자기 모습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 거짓말에 싱글맘은 선생의 학대에 고통받아 왔을 아이를 생각하며 불행해졌고, 이 거짓말에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잘못을 한 사람이 되어버린 선생은 파렴치한이 되어 불행해졌다.


이곳의 불행은 사소한 것으로부터 온다. 대부분의 사람이 사는 방식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는,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평범함을 가지지 못하는 자는 불행이란 지옥에 빠진다. 모두가 다른 사람이고, 모두가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에서, 다른 일을 겪으며 살아가기에 똑같은 모습의 가족을 가질 수 없고, 똑같은 형태의 좋아함에 이를 수 없고, 똑같은 모양의 웃음을 지을 수 없으며, 똑같은 선택을 할 수 없음에도 이들은 평범이라는 기준을 따라 걷지 못해 지옥에 떨어진다. 이들은 평범하지 못하기에 사람의 언어로는 진실을 전할 수 없다. 목이 터져라 외쳐도 평범한 사람들에게 결코 닿지 못하는 진실로 인해 불행이 가중된다. 이 불행 속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괴물의 소리로 목 놓아 우는 것, 그렇게 드러나지 못한, 억눌러왔던 진실과 진심을 담아 터뜨리는 것뿐이다.



빅크런치, 이젠 우리가 되돌아갈 시간


오해가 쌓인다. 오해에서 비롯된 서로를 향한 날 선 감정이 쌓인다. 폭발의 순간이 다가온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던 오해와 불안과 분노가 터져 나와 태초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순간이 다가온다. 빅크런치! 날 서 있던 감정이 풀려서 되돌아간다. 서로를 향한 오해가 풀려서 되돌아간다. 높다랗게 쌓여있던 좋지 않은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풀려서 되돌아간다. 평범하지 못해 불안했던 아이들은 모든 것이 와해된 세계에 발 들인다. 새로운 모습이 아닌, 다행히도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유롭게 달린다. 현실에선 아이들을 가로막아 섰던 벽이 빅크런치와 함께, 죽음과 함께 걷힌다. 길이 열린다. 아이들은 앞으로 힘차게 내달린다. 자기 모습 그대로, 평범함은 내던진 채로 앞을 향해 달린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나의 시간도 거꾸로 되돌아간다. 남자아이를 좋아하게 된 남자아이가 보여줬던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인상이 험악하고 소문이 좋지 않은 선생이 보여줬던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홀로 아이를 키우기에 극성맞은 학부모처럼 비춰진 싱글맘이 우리에게 보여줬던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영화를 막 보기 시작하려던 나의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 모든 오해와 불신과 날카롭게 벼려진 감정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후회와 부끄러움이 폭발한다. 태초의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빅크런치는 세상을 맑고 깨끗하게 모든 것을 밀어내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한다. 보이는 것만 믿고, 평범한 것만 옳은 것으로 취급한 나도 새로운 형태로의 태어남 없이, 다행히도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잘못된 시간을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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