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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Jul 13. 2024

무지하여 쓰는 참회록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블랙 스완


잘못된 판단


나에겐 무엇이 자주 보이는가. 부족한 게 보인다.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해석하여 잘못 행동했던 모든 순간이 보인다. 그것이 유난히 거슬린다. 오판에 대한 두려움이 내 생각보다 나를 더 강하게 지배하고 있나 보다. 잘못된 판단을 했는지도 모르고 자기가 맞다고 바락바락 우겨대는 그런 불쌍하고 징그러운 사람이 되기 싫으니까. 너무 싫으니까. 그런데 난 벌써 그런 싫은 사람이 몇 번은 되어본 기억이 바로 떠오르니까. 그래서 앞으로도 내가 몇 번은 그런 사람이 더 되어버리는 상황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근데 그게 또 너무 싫으니까.


예전에 못난 사람들을 몇 보았다. 그들은 아닌 척하지만 자기 세계에 빠져 자기 생각에 들어맞지 않는 모든 것을 맹렬히 비난했다. 난 너희가 말한 그것을 본 적이 없다, 들은 적이 없다, 느껴본 적이 없다, 그냥 그건 도무지 논리적으로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다. 너희가 뭘 잘 몰라서 못 본 거 아니냐, 못 들은 거 아니냐, 못 느낀 거 아니냐, 너희가 부족해서 인지하지 못한 거 아니냐. 그들의 내면이 우릴 향해 비난했고, 가끔 혹은 자주 외면도 그런 비난의 말을 해댔다. 그들이 너무나 불쌍하고 징그러웠다. 내 눈엔 너희가 틀렸는데 우리가 틀렸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틀린 소릴 하는 우리가 모자라다 여기며 비아냥대는 그들을 틀린 인간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내는 모든 소리를 다 헛소리로 여겼다. 수용하기 어려운 생각을 받아들이기 힘든 어투로 전하기에 난 그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무시하다가 안 되겠다 싶은 날은 냅다 들이받기도 했다.


내가 틀렸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때의 내가 틀렸었음을 깨달았다(모든 부분에서 다 틀린 건 아니겠지만 확실히 떠오르는 틀린 지점 몇 가지는 기억 난다). 내가 믿은 것, 그들은 싫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며 그들의 말은 엉터리라는 믿음은 그들의 옳은 말은 걸러내고 그들의 틀린 말만 움켜쥐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대부분 틀린 말만 하는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그들이 사라진 지금, 과거 그들에게 덧씌워놓은 나의 믿음이 서서히 옅어진 지금, 그들이 다시 내게 돌아왔다. 걸러졌던 그들의 옳은 말이 갑작스레 돌아왔다. 내가 틀렸고 그들이 맞았다. 나의 믿음, 그들은 엉터리이기 때문에 내 말이 맞을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 금이 갔다. 종종 그들을 무시하고 불쌍히 여기고 징그러워했던 그날을 되새김질하곤 한다. 그리고 그날이 떠오를 때마다 후회한다. 내가 그럴 자격이나 있었나, 나야말로 당당하게 억지 부릴 자격이 없었는데.


싫은 감정과 분노는 사람을 방어적으로 만든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로 중무장한 외부로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한 나의 내부를 지키기 위해 유입되는 모든 것을 막아버린다. 만약 그들을 향한 부정적인 마음을 조금만 내려놓았더라면, 그들의 틀려먹음을 그토록 맹신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내가 멍청한 소리를 좀 덜했을 텐데. 그들에게 틀린 말로 맞받아치는 그런 부끄러운 과거는 좀 덜 생겼을 텐데. 그럼 오늘도 그날을 떠올리며, 후회하며, 수치스러워하며 지금의 이 참회록을 쓰는 일은 없었을 텐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하는 순간 그것은 확정된다. 그리고 세상에 노출된다. 누군가를 향해 너는 좋은 사람이야 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좋은 사람인 것으로 확정되며, 이를 듣고 있던 이들에게 그 사람의 좋음이 노출된다. 누군가를 향해 너는 글러 먹었어 라고 말해 버린다면 그 사람은 글러 먹은 사람으로 낙인찍히며, 이를 들을 사람들은 설령 그가 좋은 사람인 걸 알더라도 기억 속 아주 작고 은밀한 곳에 '그는 글러 먹음'이라는 잔재를 남긴다. 말은 드러난다. 실질적인 영향력이 있다. 그래서 위험하다. 반대로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내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이가 없는 한 내가 누군가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든,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든 그 사람은 그저 그로서 존재할 수 있다. 내 잘못된 판단으로 잘못된 영향을 받는 이가 탄생하지 않을 수 있다.


내 생애 많은 후회의 순간이 있으나 제일 후회하는 순간은 대부분 말에서 비롯되었다. 함부로 판단하는 말.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고, 알게 되는 것 또한 흐르는 시간 따라, 쌓이는 경험 따라 늘어났다. 그렇게 조금은 성장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니 내가 함부로 흘리고 다닌 말들이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게 보인다. 여기 널브러진 말도 잘못되었고, 저기 널려있는 말도 잘못되었구나. 내가 진실에 가깝지도 않고 완성도 되지 않은 말을 아무렇게나 쏟아내고 다녔구나. 조금만 더 아껴뒀다가 말했어도, 판단했어도 늦지 않을 텐데.


내 눈 두 개, 겨우 두 개.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은 너무 협소하다. 내가 걸어갈 수 있는 시간의 길은 하나뿐이요, 심지어 외길에 직진만 가능한데 내 겨우 둘 뿐인 눈이 담아낼 수 있는 사실은 이 단방향으로 흐르는 찰나의 순간에 많은 것들을, 다양한 각도로 담아내기엔 너무 부족하다. 같은 것도 여기서, 저기서 보는 게 다를진대 내 겨우 둘 뿐인 눈은 하나의 단면만 겨우 건져 올 뿐이다. 하나의 단면만으로는 전체를 다시 그려낼 수 없다.


난 인간답게, 이야기 짓기를 좋아하는 종족답게 간신히 얻은 그 하나의 단면에 상상력을 보태어 한 편의 장면을 만들어 냈다. 그 결과 창의력이 조금 늘었다. 그리고 상처받은 타인도 조금 늘었다. 내 겨우 두 개뿐인 눈으로 바라본 아주 적은 양의 사실을 진실로 만들어내기 위한 가련한 말솜씨는 타인의 진심을 훼손했다. 진실을 알고 싶었다면 소설을 쓰지 말았어야 했다. 적디적은 소재 사이에 함부로 말을 욱여넣으면 안되는 거였다. 내가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했더라면,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이들이 담아낸 서로 다른 모양의 단면을 빌려와 내 것에 합쳐보았더라면, 그것도 아니면 부족한 단면일지라도 세심한 눈길로 요모조모 뜯어보기라도 했더라면, 아니 그냥 말하지 말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잘 알지 못하면 더 알고 나서, 더 알고 나서도 잘 알지 못하겠음 더더 알고 나서, 그렇게 진실에 가까워질 때까지 말없이 알아감으로 시간을 채워나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섣부른 판단의 이야기를 유보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착각의 소유자에게 주어지는 것


어린 시절엔 미래를 향한 힘이 있었다. 내가 원한다면 뭐든 이뤄낼 수 있는, 미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이날이 될 때까지 살아보니 세상이 복잡하단 사실만 실컷 배웠다. 나에겐 미래를 향한 힘 따윈 존재하지 않았으며, 내가 원한다고 무엇이든 냉큼 이뤄지는 일 따윈 정말 운이 좋지 않고서야 일어나지 않았다. 좁은 시간 단위, 좁은 일의 단위에선 나도 힘을 낼 수 있다.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시간 단위가, 일의 단위가 조금만 넓어져도 난 곧바로 무력해진다. 내가 미래를 향해 힘껏 내던진 기대는 원하는 궤도를 그리지 못하고 이상한 지점에서 고꾸라져 버린다.


그런데 간혹 이런 날들이 있다. 아까 말한 운, 그게 있는 날 말이다. 운이 좋은 어느 날 머릿속으로만 그렸던 미래가 정말로 펼쳐지거나 비록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일지라도 마음에는 쏙 드는 미래가 펼쳐지는 날. 그럼 난 여기서 힘을 얻어 또다시 운이 좋아야만 만날 수 있는 미래를 설계하기 시작한다. 그런 미련한 짓을 한다. 미래를 꿈꾸는 일,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는 일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내게 문제가 되었던 건 이 일에 힘이 너무 들어갔단 점이다. 오늘의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미래를 그렸는데 그 미래를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실망한다. 내 설계 실력에 실망한다. 실망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왜 원하는 형태로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지 분석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려본다. 또 실망한다. 과정을 반복할수록 그림은 점점 세밀해진다. 세밀해진 그림은 점점 더 현실에서 만나기 어려워진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미래가 만들어지는 것은 싫다. 내가 요구하는 대로 삶이 만들어졌음 좋겠다. 내 뜻대로, 내 힘으로 삶을 살아가고 싶다. 모름은 불안을 낳는다. 그래서 내가 아는 대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미래가 그려졌음 좋겠다. 지금과 다가올 미래 사이가 추상적으로 모호하게 남아있는 것은 싫다. 추상적인 것은 모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불안해서 싫다. 불안을 지우기 위해 구체적이고 정교한 지도를 그린다. 그래서 잦은 실패를 겪는다. 나의 지도는 복잡한 세상을 모두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결코 정확해질 수 없다. 그래서 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럼 난 무력해지고 화가 난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자꾸만 스스로를 다그치게 된다. 그렇게 뭐든 할 수 있단 착각의 소유자에겐 무력감과 질책만이 남는다.


다행히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체력이 떨어져 감에 따라 몸에 들어가 있던 힘도 함께 저절로 빠졌다. 그리고 현실에 너무 노출되어서인지 언젠가부턴 미래를 상상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예전보다는 힘을 빼고 가만히 흘러가는 시간을 보내는 빈도가 늘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지점과 내가 언젠간 가닿았음 좋겠다 싶은 지점 그리고 그 사이를 잇고 있는 주요 다리 몇 개만 남기고 싹 비웠다. 정확히는 자의로 지웠다기보단 힘들고, 귀찮고, 어차피 그대로 되지 않을 걸 알기에 애초에 그리지 않았다. 모름에서 오는 불안은 모름에 집중하면 할수록 심해진다. 그래서 확실하고 한눈에 들어오는 것만 남겼다. 모호한 것들, 정확하지 않은 것들은 집중할 수 없도록 아예 시야에서 치워버렸다. 그림이 단조로우니 신경도 덜 쓰인다. 덜 들여다보게 된다. 내 목적지가 어디였지? 어렴풋하게는 기억나도 구체적인 이미지는 기억나지 않게 된 지금, 드디어 기대와 욕심을 조금은 내려놓고 편하게 지금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단 착각에 젖어 살던 과거의 내가 나이 든 지금의 나를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스스로에게 실망이란 벌을 주던 때를 좀 더 일찍 벗어던졌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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