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 지나가는 나를 불러 세운다
참고 견디다 보니 또다시 이곳, 이 계절로 돌아왔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바삐 발을 움직이던 계절은 이미 지나왔고, 미처 피하지 못한 더위에 눈살을 찌푸리는 계절은 아직 오지 않았다. 딱 지금, 적절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바로 지금이 왔다. 고통스럽기만 한 온도를 피하기 위해, 나를 재촉하던 그 모든 상황을 피하기 위해 떠밀리듯 재빨리 거리를 스쳐 지날 수밖에 없는 시간을 지나온, 혹은 아직 맞이하지 않은 지금이다.
모든 것이 죽어있던 세상은 지났고, 모든 것이 완성된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제 막 무언가를 해보려는 초입부. 어디로 나아갈지 결정하지 못한 채 우선은 무작정 문을 박차고 나온 그 모든 푸르름이 돌아왔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그 무엇도 계획되지 않은 지금이 왔다. 시작 앞에 놓인 막연함 속에서 불안과 초조함을 느끼는 지금이다. 뚜렷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지금이며, 미래로의 전진을 위해 주위를 세심히 살피게 되는, 조심히 그리고 천천히 나아가게 되는 지금이다.
나에게 있어 가장 존재감 없던 계절, 봄. 겨울을 지나 여름으로, 한편의 고통에서 저편의 고통으로 건너가는 관문, 봄. 딱 그 정도의 존재감을 지닌 봄. 그 봄이 세상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나를 불러 세운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빨라질 수밖에 없던 나를 불러 세운다. 일 년의 여정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 주저하고 있던 나를 불러 세운다.
보이지 않던 것
일 년 중 가장 느려지게 되는 봄. 주어진 모든 것들을 느린 속도로, 느리게 씹어 삼키게 되는 봄. 적절한 온도감이 주는 여유로움에 기대어 이제 막 솟아오르는 색채들을 눈여겨 볼 수 있게 되는 봄. 저절로 만들어진 여유로움이 일상에도 스며든다. 이번 한 해의 종착지가 명확하지 않기에, 어디서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야 할지가 아직 분명해지지 않았기에 유난히 지금의 발길이 신중해지는 봄. 주변을 더욱 꼼꼼히 살피고, 사소한 모든 사건 하나하나에도 더욱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평소처럼 황급히 후딱 해치우지 못하고 느리게 받아들이고, 느리게 맛보게 된다.
봄 따라 저절로 실려 온 느려짐과 저절로 실려 온 경계심이 추위에 흐릿해진 시선에 힘을 불어넣는다. 겨우내 움츠러들어 있던 사람들의 활짝 펴진 어깨에 시선을 보낸다. 쑥 캐는 아주머니의 손끝에 맺힌 여린 쑥에 시선을 보낸다. 목줄이 주는 불편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촐랑이는 강아지의 활기찬 꼬리 짓에 시선을 보낸다. 조금 더 길게 스며든 햇빛이 방안에 머물다 가는 시간에 시선을 보낸다. 무심히 지나쳐 왔던 것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얼어 붙어있던 막을 허물고, 단단해진 감정을 허물고 나와는 무관하지만, 저절로 눈길이 닿는 그 모든 것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갑자기 주어진 한가로움과 예민해진 감각으로 한동안 매정하게 대했던 것들에게 잠깐의 애정을 쏟는다. 봄이니까, 적당히 따뜻하니 기분 좋으니까, 살짝 센티하니까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늘 눈에 담아내지 못했던, 늘 보였지만 늘 보지 못했던 것들에 풍족한 주의를 기울여 본다.
한 편의 시
시선이 오래 머무는 곳에는 어김없이 시가 탄생한다. 오래 바라봄으로써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아주 사소하고도 자그마한 것들이 모여들어 한 편의 시가 된다. 어제는 존재감 없던 것이 오늘 갑작스레 눈에 띄었을 때 비로소 어제의 그 별 볼 일 없던 것이 한 편의 시가 된다. 늘 함께였음에도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단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되는 일상 속 모든 평범한 것들이 다 시가 된다.
혹독한 시기를 벗어나 따스함이 찾아들 때, 얼어붙어 있던 감각이 녹아들어 다시금 예리해졌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제 존재를 구석구석 모조리, 아주 빠짐없이 드러낼 때, 그때가 도래했을 때 마침내 보이는 모든 것들, 봄볕 쬐고 있는 모든 것들에 애정 가득한 관심이 모여들어 한 편의 시 같은 것이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