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하고 비어버린

by 유온

바스러진 시간


멀어진다. 쫀쫀하게 얽혀있던 것들이 스멀스멀 풀려나간다. 점과 점들이 서로의 손을 뿌리치고 저 끝을 향해, 서로의 반대편을 향해 달아난다. 시간은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조금씩 무너져 내린다. 주어진 시간은 빽빽이 채워졌건만, 정작 받아들인 시간은 텅 비어버린 이 내 방 안에 흩뿌려진 한 줌의 모래와 같구나. 그것들을 뭉쳐보려 애써 보아도 손 틈새로 흘러내려 버린다. 가련한 그 한 줌의 시간마저 시선을 응집시킬 하나의 지점이 되지 못한다. 어제를 둘러보던 내 시선은 텅 빈 공간만 한참을 부유하다 어떠한 나도 발견하지 못한 채 현재로 되돌아가 버린다.


단단한 어제를 딛고 오늘을 살아가야 하건만, 존재조차 희미한 흩어진 모래 낱알 하나를 딛고 오늘을 살아야 하구나. 모래 한 알이 만든 지반으로 오늘의 무게를 버텨내는 삶. 버거울 수밖에. 불안정한 발끝으로 어찌 과감히 오늘의 거대한 무게를 짊어질 수 있겠는가. 당장을 버티기 위해 거르고 걸러 또다시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모래 한 줌만 남긴다. 내일은 오늘 흩뿌려놓은 모래 몇 알을 밟고 간신히 모레의 무게를 짊어질 것이다. 모레는 또다시... 예상할 수 있는 그 모든 미래의 버거움을 상상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이 모래 한 줌이라도 움켜쥐고 이것으로라도 방 안을 채울 수밖에 없는, 이것으로라도 디디고 설 수밖에 없는 스스로를 바라본다. 바스러져만 가는 나의 형태를, 옅어져만 가는 나의 존재를 느낀다.



옅어진 중력


이제는 더 이상 뭉쳐지지 않는 물질이 되어버린 시간은 텅, 하고 빈 공간을 더욱더 텅, 하고 비워버린다. 형태를 갖추게 하던 힘도 휑해진 공간 따라 텅, 하고 비어버린다. 생기를 띠며 서로에게 얽혀들던 것들이 사라져 간다. 넘쳐나는 활기로 새로운 물질을 끊임없이 이끌어 내던 어제의 물질이 사라져 간다. 기대로 벅차올라 끊임없이 내일을 갈망하던 오늘의 물질도 사라져 간다. 나를 채워내던 것들이 사라져 간다. 중심력이 옅어진다. 견고히 다져졌던 나, 인제 그만 힘과 함께 형태를 잃어간다.


중력을 상실한 별은 소멸한다. 중력을 잃은 인간은 별처럼 빛나던 그만의 고유한 빛을 잃는다. 상실한 기력을 채우지 못한 채로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는 인간은 거대한 흐름 속을 힘없이 떠내려간다. 거스를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무력감에 젖어 모두가 흘러가는 길에 자신을 맡긴다.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모두가 나아가는 그곳을 향해 모두가 나아가는 속도에 맞춰 무지한 발걸음을 이끈다.


중심을 잃고 외력이 이끄는 대로 살아간다. 나는 사라져 간다. 거대한 사람들의 흐름이 사라진 나의 공간을 허망하게 채운다. 그들과 같이 나는 사라져 간다. 중력을 잃고 소멸해 버린 이들처럼 나 또한 사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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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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