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리지 않는 것을 향한 끌림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나의 취향을 외면하고 너의 취향에 맞춰놓고 살아가는 나의 지금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를 존중하지 못한 채 너의 기호에 따라 매분 매초를 채워 나가는 나의 시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를 편안하게 하는 보폭을 무시한 채 너의 질주에 맞춘 나의 속도를 좋아하지 않는다. 가쁜 숨을 토해내는 데도 너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억지스레 뜀박질하고 있는 나의 신세를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무게를, 나를 잔혹하게 짓누르는 이 묵직함을, 이 숨 막히는 고통을 무조건 수용해야 하다고 여기는 쓸데없고도 미련한 이 책임감을, 너를 위한 이 모든 걸, 나를 위하지 못하는 이 모든 걸 놓지 못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너의 세계에 끌린다. 이토록 매력 없는 수동성에 나는 매료되어 있다. 도망칠 생각도, 의지도 없이 끌리지도 않는 너를 위해 너에게 맞춰진 일상에 목을 매고 있다. 이러한 부조리함이 시키는 대로 꾸역꾸역, 그럭저럭 매일을 살아간다.
난 왜 너를 놓지 못하는가
불편함은 참다 보면 익숙해진다. 짜증과 분노는 억누르다 보면 무뎌진다. 오냐오냐, 옳다옳다. 이 모든 '그러려니', 이 모든 '지금만 넘기자', 이 모든 '이 또한 지나가리'. 이런 부질없는 것들로 귀한 삶을 야금야금 채워간다. 나의 거룩했던 의지, 한때나마 찬란히 빛났던 의지는 이러한 모든 체념 섞인 말들에 갉아 먹힌다. 조금씩 삭아 없어진다.
서서히 비워진다. 공허. 텅 비어버린 눈동자로 아득하게 멀어진 내일을 바라본다. 텅 비어버린 입술로 아무런 의미도 실리지 않은 무미건조한 말을 읊조린다. 어린 시절엔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채워지던 내 과거, 내 현재, 내 미래의 의미들이 너로 인해 찌들어 버린 지금에 와서는 푸석거리는 모래알처럼 뭉쳐지지 못하고 바람 따라 이리저리로 흩날린다.
어제보다는 조금만 더 힘들어졌을 뿐이니까, 막 또 그렇게 죽을 것 같이 힘들어지진 않았으니까. 참을 만은 하니까. 이러저러한 이유로 버티고 버티다 보면 발악이라는 파괴적인 선택지와 도망이라는 무책임한 선택지는 서서히 내 손에서 멀어진다.
지금만 남긴다. 지금을 살아남기 위한 행위만 남긴다. 그리고 나머지는 버린다. 그럼, 조금은 삶이 가벼워진다. 왜라는 질문을 버린다. 숭고함을 찾으려는 시도를 버린다. 의미를 덧붙이려는 노력을 버린다. 감정을 버린다. 그럼, 조금은 마음이 단순해진다. 이러저러한 포기로 비우고 비우다 보면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희망과 본연의 아름다운 가치를 얻고자 하는 꿈이 서서히 내 마음에서 멀어진다.
뻐꾸기 둥지
무엇을 위함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너를 따라 바쁘고 힘겹게 살다보면 무엇을 위함인지를 생각해야 할 필요성을 잊게 된다. 자꾸만 네가 다그치니까 중요한 것들도, 아름다운 것들도, 나를 위한 것들도 일단 급하니까 '에라 모르겠다, 나중에 생각하자' 하고는 그리 넘기고 만다. 이러한 힘 빠지는 체념이 무기력을 낳아 기른다.
무기력에 허우적대는 나는 너에게서 힘을 얻는다. '저 사람은 이러저러하게 산대, 저 사람은 너보다 이만큼 더 열심히 산대, 이만큼 더 잘 산대.' 네가 제시하는 비교라는 비전. 더 높은 위치의 등장. '그래 조금만 더 힘내서 저 사람 기준 정도로 나를 맞춰보자' 하는 너에 의해 만들어진 다짐. 너의 말마따나 저 사람의 저 높은 곳이 지금의 내 위치보다 좋아 보이니까 저기까지만 가면 의미가 생겨나지 않을까, 지금의 이 무의미한 일상에 의미를 되찾아주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기대. 이러한 의미 없는 의미 양산이 내 본연의 가치를 둥지에서 떨어뜨리고 살아남는다. 나는 사라진다. 나 사라진 공간에 내가 배제된, 너만을 위한 의미가 살아남는다. 나는 결국 네가 된다. 너는 결국 내가 된다. 나는 나를 잃고서 너에 의해 살고 너의 말로 움직인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나는 글을 쓰겠다. 네 앞에 당당히 맞설 용기가 없어, 이렇게 뒤에서 글이나 쓰겠다. 나를 위한 글을 너 몰래 쓰겠다. 지금 써 내려가는 한 글자 한 글자를 끌어모아 너에게 맞서기 위한 체력을 키우겠다. 모호하게 와닿던 너의 부당함을 글로 실체화한다. 너의 채찍질에 무력해지지 않으려고, 너의 당근에 또다시 회유되지 않으려고 나 힘을 기르겠다.
나는 글을 쓰겠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기억해 내기 위한 글을 쓰겠다. 내가 진정으로 매력을 느끼는 이들을 향한 글을 쓰겠다. 내가 옳다 여겼던 것들과, 내가 자유롭다 느끼는 순간들과, 내가 끊임없이 자라날 때 느낀 희열들과, 내가 진심으로 알고 싶었던 것들, 내가 긍정하는 것들로 채워진 지난날의 나를 다시금 끄집어내겠다.
나는 글을 쓰겠다. 너에게 송두리째 위탁한 나의 삶을 되찾기 위해 글을 쓰겠다. 네가 만들어낸, 조악하고 억지스러운 의미는 지우고 참된 의미를 써 내려 가겠다. 지극히 나에게 자연스러운 글자만 골라서 쓰겠다. 나를 존중하기 위한 글을 쓰겠다. 여기, 이곳에서만이라도 너를 버리고 나를 살리려는 시도를 이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