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드모나코 감독의 더 퍼지(2013)
공포의 전야
공포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영화의 설정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다. 여기엔 네 명의 가족이 등장한다. 두 아이의 아버지인 제임스는 보안회사에 다닌다. 그 덕에 이들은 숙청의 날이 있고 난 뒤로 쭉 부유하고 안전한 삶을 보내고 있다. 가족 간에 약간의 삐걱거림이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특별할 것 없는, 그저 평범한 가족이다.
숙청의 날은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는 날이다. 제한된 시간 동안은 사람이 사람을 죽여도 된다. 죽이는데 어떤 이유가 붙든 상관없다. 대체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죽어 나간다. 사람들은 이 시간 동안 잠재되어있던 폭력성을 모두 털어낸다. 이들은 그러한 행위로 자신이 정화된다고 믿는다. 그러곤 숙청의 날이 끝나면 다시 평온한 삶으로 돌아가 아무 일 없었단 듯 인간적인 생활을 이어나간다.
사건은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이곳은 요새와도 같던 공간이었다. 충분히 숙청의 날을 무사히 보낼 수 있는, 그런 안전한 장소. 이 공간에 네 명의 가족이 모인다. 그리고 조용히 이날이 지나길 기다린다. 더 퍼지의 공포는 이러한 설정에서부터 시작된다.
공포의 시작, 그 첫 번째는 분리
이 영화에서 내가 느낀 가장 큰 공포는 가족의 분리이다. 가족은 모두가 함께일 때 완벽하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특히나 밖이 위험하다면 집안에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있을 때 비로소 안전함을 느끼며 안도하게 된다.
그러나 찾아온 방문객들은 이들을 분리한다.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분리된 이들 가족은 불안정한 상태에 빠진다. 안전해제. 마치 민달팽이가 된 것처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완벽하게 노출된, 위험으로 무장한 상태.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더할 나위 없이 불안한 상태가 된 것이다.
두 번째는 위협 앞에서의 무력감
어떤 문제라도 함께라면 극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가족, 도덕이 존재하는 평화로운 사회 그리고 온갖 위협으로부터 우릴 지켜줄 집. 언제까지나 견고하게 나의 삶을 지켜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다 무너진다. 깨부숴진다. 그리고 짓밟힌다.
언제나 잃는 것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을 잃게 될 상황이 오면 그 형태야 어떻든 초조해지고 겁이 난다. 영화는 외부의 위협을 통해 이들 가족이 많은 것을 잃게 한다. 위협받는 그들의 공간, 그들의 도덕성. 그리고 마주하게 되는 가족의 밑바닥.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지키기에 가족은 약하다. 그래서 불안감은 고조된다. 위협은 언제고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위협이 공포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은 그런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내 주변의 것을 지킬 힘이 부족할 때, 내가 무력함을 깨달을 때이다.
이러한 공포는 상당히 현실적이라 더 무섭다. 언제고 내가 마주할 순간이 올 수 있기에. 단순히 보여지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공포를 주기 어렵다. 깜짝 놀랄 순 있어도 진정한, 근원적인 공포를 심을 순 없다. 그런 측면에서 더 퍼지의 공포는 상당히 지속적이고 뿌리 깊은 공포를 지니고 있다. 영화 밖에서도 우린 내가 지닌 것들을 언제 잃게 될지 모를 불안감과 지금의 이 현실이 언제 무너질지 모를 불안감에 공포를 느낄 테니까.
세 번째는 끝나길 기다리는 시간
시간제한은 이 공포를 더 극에 치닫게 한다. 분명 끝이 정해져 있는 싸움이란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조금만 버티면 이 지옥 같은 순간은 끝이 난다. 그래 조금만 버티자. 그렇게 우리는 그 마지막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린다. 그러나 시간은 더디게 간다. 상대적으로 러닝타임이 짧음에도 영화가 긴 듯한 착각에 휩싸인다. 아무리 기다려도 끝나지 않는 기분. 그러는 동안에도 영화는 모든 것을 극도의 상황으로 몰고 간다.
영화에서 공간만 폐쇄된 게 아니었다. 시간마저도 폐쇄되어있다. 이 숨 막히는 폐쇄성에서 우린 짧아진 호흡으로, 다급한 시선으로 영화를 따라간다. 꽉 막힌 구조에서 궁지에 몰린 생쥐가 되어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으로 강압적인 공포를 맛보게 된다.
네 번째는 찰리를 향한 불편한 이 내 마음
찰리는 굉장히 ‘암’적인 존재였다. 그를 보면서 욕을 몇 번이나 했던가. 이번에 다시 보면서도 그랬다. 여전히 보면서 마구 욕이 지껄여졌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내가 왜 저 아이를 욕하고 있지. 이 아이가 정상인데.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인데.
모든 사람은 폭력성이 내재하여있다. 타인이 고통받는 것을 즐긴다는 말도 들었다. 나와 직접적 연관만 없다면 누군가의 고통은 내게 유흥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이다. 이런 본능과도 같은 모습을 현실은 알지도 못하는 꼬맹이가 거부한다. 찰리는 영화 속 사회가 요구하는 삶을 부정한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신의 소신을 지키다 가족을 위험에 빠뜨린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될 것을 위해, 다른 구성원은 원치 않는 것을 위해. 이 치솟는 짜증과 불편함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역시 착하게 살면 안 되는구나. 나는 물론이고 내 사람들도 위험에 빠뜨리는 짓이구나.’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찰리의 인간적인 행동과 가족이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애초에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어쩌다 상관관계가 생긴 것이지 찰리가 인간적이라서 가족이 위험해진 것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들 가족, 나아가 우리들 또한 영화 속 사회가 강요하는 삶을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당연시하고 있단 점이다. 그렇게 한참을 사회가 아닌 찰리를, 이 힘없고 정직한 개인을 욕하다가 이 이상한 사회 때문에 이들이 위험에 빠지게 된 것임을 알아차리게 된 순간 진짜 공포가 엄습해온다. 이 사회가 영화 밖, 이 현실에서도 충분히 재현될 수 있겠단 사실이 현실적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