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2011), 창(2012)
돼지의 세계는 끝나지 않는다
힘, 폭력은 더 약자인 자에게 두려움을 심어준다. 그리고 우린 생존을 위해 두려움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면 폭력이 약자를 돼지로 만든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돼지는 힘 있는 자의 아래에서 그저 먹기 위해 산다. 내가 누구인지, 왜 먹어야 하는지, 왜 따라야만 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습관처럼 먹는 행위만을 반복할 뿐이다. 돼지가 사는 세계는 먹는 것만이 당연한, 자유를 상실한 세상이다. 이들이 자유를 빼앗기고 돼지가 되어버린 것은 진정 힘의 논리 때문인가 아니면 그저 편하게, 불편함 없이 살고자 하는 나태함이 부른 참사인가.
권력자를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은 돼지들이 권력자의 체계를 견고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우린 나쁜 권력자들이 언젠간 죗값을 치를 거라며 자신을 다독이곤 한다. 그러고 보니 권선징악이란 말이 우릴 가장 돼지답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알아서 누군가가, 알아서 정의가 존재하는 이 세상이 악을 무찔러줄 것이라는 믿음. 이 악과의 전투에서 나라는 사람은 진즉 배제됐다. 그렇게 우리가 모두 전투의 밖에서 누군가가 나타나길 기다린다. 한없이 나태한 마음으로 돼지의 영웅을 기다린다.
생각의 사실성
<돼지의 왕, 2011>에서 돼지들은 자신들을 구해낼 왕을 얻는다. 이들은 점점 왕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부풀려간다. 우리의 왕은 절대 지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강하다. 이제 우리의 왕은 악으로 가득 찬 이 학교를 부숴줄 것이다. 그럼 우린 행복해질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이 완고한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왕은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왕은 무슨 수를 써서라고 우릴 지키기 위해 악을 무찌르고 정의를 실현해야만 한다.
우리가 생각하면 할수록, 기대하면 기대할수록 왕은 실체를 잃어간다. 허상, 거짓, 무가치.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오히려 본질을 잃게 한다. 왕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일 뿐인데 그 위에 덧씌워진 무수히 많은 생각의 무게가 그를 밑바닥에 누르고 그 위에 군림한다. 그렇게 진짜는 사라지고 가짜만 남는다.
<창, 2012>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선 모든 문제가 창으로 귀결된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성실했으며, 얼마나 화목했는지 따윈 더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진실은 필요에 의해 충분히 덮이고도 남는다. 창이란 그럴싸한 껍데기가 진실 위에서 진짜가 되어버린다.
공개죽음
우린 두 작품 모두에서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한 작품은 진짜 죽음을, 다른 한 작품에선 자살 시도를 보여준다. 둘 다 보여주기 위한 죽음이다. 나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공개죽음. 여기서 난 이들의 죽음을 향한 시도보다 내가 이런 죽음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에 더 주목했다. 생명은 모두 소중하며 때 이른 죽음을 무조건 안타까워해야만 하는가, 그들이 죽는다고 사회에 어떤 변화가 생길 수 있겠냐며 비아냥거릴 것인가, 이들의 희생에 자극받아 나라도 변해야겠다며 각오를 다잡을 것인가.
솔직히 난 하소연식 죽음을 좋게 보지 않는다. 그들의 공개죽음이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란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주변에 큰 트라우마를 남긴다. 이로 인해 주변 이들은 오히려 생각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긴 채 죽은 이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게 될 수도 있다. 내가 항상 옳을 수는 없다. 그러니 나의 뜻을 펼쳐보겠다고 공개죽음을 택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