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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Apr 29. 2024

뮤츠의 역습

유야마 쿠니히코, 마이클 헤이그니 감독의 뮤츠의 역습(1998)


포켓몬은 친구인가


어릴 적엔 포켓몬은 당연히 친구라고 여겼다. 그 당시 나에겐 친구의 의미가 그리 심각하게 고민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같이 붙어 다니고 친하기만 하면 다 친구라 말할 수 있었던 때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내가 자란 만큼 친구의 의미도 함께 성장했다. 해서 지금은 포켓몬과 인간을 친구라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포켓몬과 인간 사이를 친구라 규정하기엔 아니라 말하고 싶은 모습이 이제는 보이기 때문이다.


현실에 놓고 보면 포켓몬은 애완동물과 비슷하다. 내게 있어 애완동물은 친구 관계라기보단 소유 관계에 가깝다. 내가 원할 때 나와 함께 있어 줄 수 있는 존재. 그리고 그들의 의지보다 나의 의지가 더 중요한 관계. 그것이 바로 '소유'이다. 포켓몬은 한발 더 나아가 인간에 의해 훈련을 받고 인간의 지시로 같은 종족끼리 싸움을 벌인다. 인간의 재미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친구라 포장했지만 결국 그들은 주인에게 맹목적으로 헌신하는 희생자인 것이다.



친구의 정의


그렇다면 친구는 무엇인가? 친구라는 것이 서로에 대한 높은 이해력과 친밀감, 공존하는 시간으로 규정되던 시절, 잘 맞아서 시작된 관계는 대부분 맞지 않는 부분을 하나씩 발견해가면서 서서히 또는 급진적으로 와해되어갔다. 그러고 보면 그땐 친구는 나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친구라면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은 마음을 가질 것이란 기대를 자연스레 품었다. 그래서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높아지고 결국엔 그 기대를 충족 받지 못해 실망하고, 나로선 친구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 바빴던 그런 소모적인 관계. 그 속에서 지쳐가다 결국 놓아버리고 마는 것이 친구였다.


지금은 나를 위해서도 친구를 위해서도 한발 물러나기를 선택했다. 서로에게 한 발짝 물러남으로써 그 자체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기 위해서이다. 물론 관계의 긴밀성은 이전만 못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전보다 외로워졌냐면 그렇지는 않다. 예전의 관계가 실망으로부터 오는 공백이 더 큰 외로움을 불러왔었기에 지금의 친구 관계는 오히려 나를 덜 외롭게 만든다. 그리고 멀어진 거리만큼 관계의 유연성이 생긴 덕에 부담 없이 다양한 이들과 어울릴 수도 있게 되었다. 그간 친구란 묵직하고 진득한 것이라고, 귀하고 대단한 관계여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렇다. 가볍고 자유로운 관계를 추구한다고 해서 진짜 친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정답은 없듯이 친구의 의미 또한 정답은 없다. 그저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진짜 친구인 것이다.



포켓몬 복제의 심각성


동물 복제를 놓고 우리가 '이것은 진짜요, 저것은 가짜다' 그리 구분 짓는 게 정말 중요하냐고 스스로 자문해보자. 그럼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2017>와는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인간 복제에 대해 생각할 때와는 다르게 심각성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 내겐 포켓몬도 동물 복제와 비슷하다.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그 심각성을 못 느낀 것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아닌 포켓몬의 복제이기에 심각성을 더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 복제가 문제 시 되는 건 결국 인간에게 직접적 해를 미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하에 달린 것이다.



진짜와 복제의 만남


나와 꼭 닮은 사람을 개인 대 개인으로 마주하게 되는 상황을 상상해봤을 때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가? 영화에서처럼 서로 편을 갈라서 싸우는 장면이 떠오르는가? 나의 경우 '자기애'라는 단어부터 떠오른다. 영화로 치면 피카츄가 보여준 모습에 가깝다. 우린 손해를 보기 싫어한다. 하지만 나와 유사한 존재로부터 손해를 입었을 땐 그리 싫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주고 싶어진다. 잃는 만큼 나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는 양 손실 이후 감정이 상향 선을 탄다.


조금 더 나아가 자신이 다른 누군가의 복제와 개인 대 개인으로 마주하게 되는 상황도 생각해보자. 이번엔 '친구'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다름이 만들어낸 장벽이 거리낌 없는 수용, 이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인지 진짜 집단의 사람과 함께 할 때보다 더 편한 느낌도 든다. 시작만 다를 뿐이다. 나머지는 개성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진짜와 복제가 마주하게 되는 상황을 꽤나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이 영화 속 처음 진짜와 복제가 마주하게 되는 장면도 그렇고, 복제된 생명체를 다룬 다른 영화에서도 그렇고 진짜와 복제는 서로에게 적대감을 품은 채 공존하지 못한다. 난 이 이유가 집단에 있다고 본다. '진짜'가 모인 집단과 '복제'가 모인 집단이 집단의 생존과 권위의 우위를 점령하기 위해 서로 싸우게 되는 것이다. 집단이 움직이면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애초에 시작되지 못한다. 집단 속의 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집단이 이끄는 방향대로 몸과 마음을 움직일 뿐이다. 진짜와 복제가 만났을 때 집단적 사고에서 벗어나 나와 그들이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나게 된다면, 그러한 만남의 과정에서 서로를 알아가고 같은 부분은 같은대로, 다른 부분은 다른대로 인정한다면 불필요한 싸움은 줄 일 수 있지 않을까?



눈물 그리고 인간


"눈물은 인간만 흘린다."


처음엔 너무 생뚱맞은 대사라서 저 말에 별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진짜 포켓몬과 복제 포켓몬이 싸움을 멈추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 와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 영화가 눈물이 인간만의 특권이라 말한 것이며, 결국엔 포켓몬도 눈물을 흘리게 함으로써 이들을 인간의 범위 안에 들였는가.'


인간에 관해 얘기하기 전에 눈물의 의미부터 짚어봐야겠다. 눈물은 기본적으로 슬플 때 나온다. 그리고 슬픔이란 아픔에서 온다. 아픔! 난 여기에 주목하고 싶다. 지우가 뮤와 뮤츠의 싸움을 멈추게 하려다 돌이 된다. 이미 서로 간의 싸움에 지친 포켓몬들은 그 광경에 눈물을 흘리게 된다. 이때 그들의 마음, 그들이 느꼈을 아픔은 미안함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특히나 이러한 종류의 미안함은 나와 비슷한 존재에게 상처를 가했을 때 더 큰 아픔을 맛보게 된다. 그들이 받은 상처가 더 잘 이해되기 때문에.


상처에 대한 이해, 공감은 나에 대한 이해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아픔을 느끼는지 알아야 하며 나와 상처받은 이의 유사성을 찾아내기 위해서도 나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결국 아픔을 느끼고 이로부터 눈물을 흘리기 위해선 자신에 대한 이해가 필수이다. 눈물이 인간만 흘린다는 건 어쩌면 그런 자기 이해가 가능한 존재로 인간을 정의했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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