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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May 05. 2024

보이후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2014)



영화가 변했다면


나이를 또 한 번 먹어서일까. 지금의 내가 아이들에게 익숙해져서일까. 영화가 처음 봤을 때와는 너무나 달라졌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땐 러닝타임에 1차로 압도당하고 영화의 지루함에 2차로 압도당했다. 다 보고 나서도 그다지 유쾌하다거나 감동적이거나 기억에 남는다거나 하지 않았다. 내 취향과 거리가 한참은 멀어서인지 그저 지루했단 기억뿐이다. 그래도 좋은 영화를 이대로 날리긴 싫어서 다음에 시간 나면 다시 봐야지 했는데 이날까지 잊고 있었다. 사실 그 길고 지루한 싸움을 선뜻 시작할 자신이 없어 잊은 척했단 게 더 맞는 말이겠지만.



그렇게 시간은 흘러 오늘이 되었다. 의무로 봐야 할 상황이 온 것이다. 보는 내내 몸을 비틀어대던 게, 마치 어제의 일처럼 떠오르는데. 하지만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악물고서라도 봐야 한다. 혼자 마음을 다잡고 영화를 틀었다. 그런데 정말 말도 안 되게 재밌었다. 3시간이 딱 적당하다 느껴질 만큼, 긴 시간이었음에도 끊어보기가 싫었을 만큼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영화가 묘하게 관심을 잡아끌어서인지 장면 하나하나를 다 집중해서 보게 됐다. 그만큼 좋았다. 그래서 낯설었다. 너무나 상반된 이 두 감상이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그렇게 오래전 일도 아닌데, 그간 심경의 변화가 컸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다르게 보일 수가 있나.


같은 영화, 비슷한 시기, 거의 그대로인 듯이 보이는 나. 그럼에도 영화는 완전히 다르게 보이고 우린 다른 느낌을 받는다. 시간에 따라, 환경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겉으론 그대로일지라도, 나조차 인지하지 못했을지라도 내면은 잠깐 사이에도 크게 바뀐다. 모든 건 나로부터 시작된다. 영화의 변화도 나로부터 시작된다.



아이가 담긴 영화를 보다


최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 2004>를 봤다. 아이의 성장을 담아냈단 점에서 (심지어 러닝타임도 비슷하다!) 보이후드와 공통되기에 나는 이 두 작품을 나란히 놔두고 서로 비교하게 됐다. 그리고 발견한다. 이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가 아이를 관찰하는 시선과 관찰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의 경우 영화는 아이들이 처한 상황에 분노하게 한다. 저 착하디착한 아이들이 버려진 사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들의 생존, 그 힘겨운 싸움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번진 분노. 우린 이를 사계가 한 바퀴 돌 동안 보게 된다.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이들의 고통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린 목격자이자 영화 속 아이가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에 더 고통받게 된다.


보이후드는 고통으로 점철된 아이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냥 희망만을 예찬하는 그런 영화도 아니다. 비록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랑을 받기도 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되기도 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는 외롭단 느낌을 거의 받지 못했다. 친구도 가족도 있는 삶이다. 그 속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움은 있었지만, 그것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모든 사실을 감독은 아주 긴 시간 동안 진득하게 담아낸다. 여기서도 우린 마찬가지로 관찰자의 입장과 아이의 입장을 동시에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함이 아닌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끈기 있게 바라보게 된다. 마음이 쓰리기도, 훈훈해지기도, 허전해지기도, 꽉 들어찬 기분도 느끼게 된다.



이사를 가다


지금까지 함께 했던 집에서 나의 자람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떠난다. 그것이 이사이다. 잦은 이사로 아이들은 그간의 흔적을 여럿 지웠다. 그렇다고 나의 소중했던 과거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기억이 옅어진다. 잊고 싶지 않아도 다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지금을 살아가기 위해 과거는 뒤로 밀려난다. 과거는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나는 과거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런 과거가 흔적을 감추게 된다는 사실이 이 영화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이었다.



자라는데 걸리는 시간과 그 적정 속도


"집 떠나 혼자 살고 사진에 대해선 좀 더 배우겠지만 대학생 된다고 뭔가 확 변할 거 같진 않아.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일 뿐. 이게 미래의 열쇠는 아냐. 우선 우리 엄마를 봐. 학위도 땄고 좋은 직업도 있고 돈도 벌지만, 우리 엄마도 나만큼 헤매면서 산다는 거지."


"이젠 뭐가 남았는지 알아? 내 장례식만 남았어!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성장의 끝은 어디인가. 완성됐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은 언제쯤이면 마주할 수 있을까. 아이를 다 키워 독립시키고 나면 내 삶은 완성되어 있을까? 내가 원하는 직급을 얻게 되면 그땐 완성이란 말을 붙일 수 있을까? 우리는 아무리 더 나은 삶을 위해 아등바등 살아도 공허함을 느낀다. 열심히 노력해서 원하던, 목표하던 것을 얻어도 성취감을 느끼는 것은 그 순간뿐이다.


조금은 내가 여유로워졌을 때 지난날의 나를 되돌아보는 날이 한번은 찾아온다. 그리고 그날 난 뭘 위해 이리 열심히만 살았는지, 내게 남은 것은 뭔지를 자문하며 괴로워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진작 끝냈어야지. 전원차단"


우리는 저마다 자라는데 적당한 속도가 있다. 너무 빠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은, 남들과는 다른 그런 속도 말이다. 그런데 세상은 그 적정 속도는 무시하고 그저 나를 향해 "빠르게 빠르게"만을 외친다. 자라기만 한다고 내가 완성되는 것도 아닌데. 세상은 나의 속보다는 빈껍데기만 키워내려는 듯하다.


"아뇨. 아직이요."를 연발하는 메이슨에겐 느린 속도가, 사만다는 그보다는 빠른 속도가 어울린다. 제 속도를 살아내고 있는 아이들은 이 사회가 강요하는 속도와 달라 불안을 느낄지라도 남들보다 조금은 더 단단해 보인다. 우리가 자신을 단단히 하려면 우리에게 알맞은 속도로 자라야 한다. 그 적당한 속도에 맞춰 내 속을 든든히 채워야 비로소 쉽게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우울한 아이의 탄생


사랑의 격차. 형제가 있다면 사랑과 관심은 상대적이게 된다. 누구는 조금 더 이쁨받고 누구는 조금 더 등한시된다. 절대적일 것 같은 사랑에도 어쩔 수 없이 서열이 매겨진다.


사만다는 뭐든 잘하는 데다 어른들이 좋아할 법한 모습을 잘 보여주기에 어른들에게 이쁨을 받는다. 이 아이는 자라서 활발하고 밝은 아이가 된다. 게임을 좋아하고 공부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는, 생각이 깊은 메이슨은 사만다보다 어른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이 아이에겐 우울함이 많이 고이게 된다.


물론 메이슨이 원래 그런 성향이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밀린 사랑의 서열이 아이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아이는 사랑을 먹고 자란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든 질투심을 느낀다. 누구보다 덜한 사랑을 받으면 불만이 자리 잡게 되고 이것들이 쌓여 이후 폭발하거나 체념하거나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메이슨의 우울은 그 중 체념을 선택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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