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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May 05. 2024

인 더 하우스

프랑소와 오종 감독의 인 더 하우스(2012)



어떤 욕망에서 시작된


완벽해 보이는 집, 완벽한 가정, 완벽한 여인. 자신은 가지지 못한 완벽함을 갖춘 집은 클로드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완벽한 가정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었을까, 자신도 가지고 싶단 욕심이었을까, 따뜻한 분위기 속에 녹아보고 싶었던 것일까, 완벽한 형태를 부수고 싶단 짓궂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는 그 집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고 그런 자신의 욕망을 실현한다.


그의 욕망, 그 진정한 근원은 어디에 닿아있을까?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 중 하나는 '예술 작품이라면 무조건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 클로드에게서 비롯되는 글은 아름답기를 희망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아름다워지길 바라는 것 같지도 않다. 그가 소설에 담아내고 있는 욕망은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밖으로 들어내기 위함이며, 이를 통해 어떤 이의 관심과 인정을 받기 위함일 뿐이었다.



아름다움을 가지게 되는 순간


소설에 투영된 클로드의 마음이야 어떻든 우린 그의 소설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낀다. 웃긴 일이다. 우리가 선뜻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드러내기 어려운 이유는 타인으로부터 더럽다는 시선을 받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보이는 모든 열망은 더럽기는커녕 예술이란 이름을 붙여 마땅하다.


제르망의 아내, 쟝의 갤러리를 떠올려보자. 그녀의 갤러리는 성인용품점을 의심케 하는 작품부터 특별할 것 없는, 아주 일상적인 물건까지 전시된다. '저런 아무 가치도 느껴지지 않는 것들이 정말 예술작품이라고?' 이 갤러리에서 전시되는 작품들은 아무런 감흥 없이 그저 헛웃음만을 불러일으킨다.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연이어 클로드의 소설이 등장한다. 그의 글은 현실이라면 더럽다 손가락질받을 수 있는 불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 말한 작품들과는 달리 클로드의 소설은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나는 이를 열망의 공유에서 찾았다. 나 또한 그가 열망하는 것을 함께 열망하게 됨으로써 그의 욕망이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이러한 열망의 전이를 위해 작가 또는 감독은 독자나 관객이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게끔 만들 수도 있고, 여러 장치를 통해 몰입감을 줄 수도 있으며, 장면 간의 연결과 이야기의 전개 속도를 통해 우릴 감정적으로 몰아붙일 수도 있다. 또한 현실과는 다른 공간임을 종종 일깨워줄 수도 있다. 그런 욕망이 드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해주기도 한다. 이런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 작품을 접하고 있는 이들이 현실에서의 자신을 포기하고 작품에 직접 참여하게 한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이 거듭난다. 더럽던 욕망은 어느새 나의 경험 화 되어 이전과는 달리 아름다움을 지니게 된다.



담아내고 싶은 사람, 담아내고 싶은 욕망


담아내고 싶은 사람 또는 그러한 것들은 어떤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나의 어떤 욕망을 자극한 것일까. 영화를 보면서 정말 공감이 많이 갔던 부분은 작품 소재를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나 또한 눈에 띄는, 글로써 담아내고 싶은 이들이 있다. 가깝게는 동네 미친 아줌마부터 시작해서 한때 매주 밤늦게 버스에서 마주치던 빨간 패딩 할머니, 막 중학교 들어갔을 때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메롱을 외치고 지나갔던 아저씨, 어릴 적 우릴 보며 인자하게 웃어주시던 벙어리 할머니와 요즘 거의 매일 만나는 독특한 성격의 아이들. 그들을 만난 것은 나에게 있어 굉장히 특별한 사건이다.


하루하루가 똑같기만 한 일상에서 만나게 된 이 특이한 인물들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그들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가. 그것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한 편의 작품이 탄생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누구에게나 틈은 존재한다. 에스터와 제르망의 경우 이 틈은 아주 작아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다. 클로드의 경우는 그 틈이 눈에 띄게 크다.


틈이 작은 사람은 이 틈의 존재에 부주의하다. 알면서도 큰일 있겠나 싶어 무시한다. 틈이 큰 사람은 그 틈을 메꾸려 노력하거나, 숨기려고 노력하거나, 타인의 틈을 무너뜨려 자신과 동일하게 만들려 노력한다. 그렇게 틈이 큰 사람은 아등바등 노력하며 산다. 클로드와 제르망, 이들의 차이는 여기, 이 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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