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온 May 05. 2024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에단 코엔, 조엘 코엔 감독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폭력성, 잔인함


사람만 나오는 영화 중 가장 무섭다고 각인이 된 영화이다. 처음엔 영화명, 포스터가 주는 느낌으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폭력성과 잔혹함에 적잖은 불쾌감을 느꼈었다. 그런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엔 꽤 여유를 가지고 봤으나 여전히 불쾌감이 남았다.


폭력적이고 잔인한 영화 중 불쾌감을 주지 않는, 오히려 쾌락을 주는 영화들이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이나 소노 시온 감독의 작품은 인간의 생명에 큰 무게가 실려있지 않다. 죽이는 것은 그저 행위일 뿐이다. 화려한 색감과 동작, 단순한 감정선(표면적으로는 그래 보였다), 재밌는 연출 등이 영화 속 모든 것을 가볍게 바라보게끔 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경우 앞서 말한 감독의 작품과는 달리 여러모로 무게가 잡혀있다. 단순히 흥미를 자아내기 위한 폭력성과 잔인함이 아니다. 관객에게 특정한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또는 깊은 생각을 끌어내기 위한 도구에 가깝다.



인간사냥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보면서 한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인간사냥". 이 단어가 떠오른 건 어쩌면 감독이 의도한 바였는지도 모른다. 르웰린의 사냥 씬으로 영화의 막이 올랐으니 사냥이란 단어가, 사냥하는 장면이 뇌리에 박혀 영화를 보는 내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코엔 형제의 이전 작품 중 <파고, 1996>라는 영화가 있다. 파고의 경우 블랙코미디로, 돈을 위해 아내를 납치함으로써 생기는 사건들을 코믹하게 풀어낸 영화이다. 이 작품도 보고 나면 묘한 불쾌감이 남는다.


두 영화에서 느낀 이 불쾌감의 근원은 인간의 가치를 비이상적인 형태로 떨어뜨린 연출에 있지 않을까 싶다. 파고의 돈 때문에 발생되는 연쇄적인 살인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인간사냥을 즐기는 살인마 안톤 쉬거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가치를 눈에 거슬리게 떨어뜨림으로써 영화를 쉬이 즐기지 못하게 한다.



포기를 모르는 자


영화 속에서 나름 요즘 사람인 르웰린과 안톤 쉬거.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포기를 모른다'는 점이다. 돈 가방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르웰린, 사냥감은 무조건 죽이고야 마는 안톤 쉬거. 물론 이들이 관심 가지는 대상도 문제가 있지만, 대상을 향한 그들의 포기하지 않는 행동이 그들을 더욱 비인간적으로 만든다.



노인은 누구인가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자, 과거 자신의 젊었을 적과 요즘의 젊은이를 비교하며 젊은이를 비난하는 자. 영화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는 기존의 노인에 대한 인식이다. 이러한 기존의 인식은 노인들이 지금을 긍정적으로, 적어도 비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여도 모두가 지금보단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런 비인간적인 세상도 적응할 필요가 있다며 변화에 순응하길 강요받는다는 건 나조차도 꺼려지는 일이다. 그렇다면 감독이 노인을 아끼는 마음으로 관객의 생각을 바꿔버린 것인가.


처음엔 우리의 인식 속 노인과 영화가 보여주는 노인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요즘 사람과 노인이 단순히 그 집단을 뜻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상징하고 있단 생각이 든다. 설령 우리가 생각하는 그 젊은이, 노인이 맞다 해도 이들에 대한 영화 속 묘사, 태도, 상징성은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